[시론] 고이즈미가 결단을 한 까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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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일본 총리는 7월 이라크에 자위대를 파견하기 위한 법안을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일본 정부는 10월 15일 이라크 복구를 위해 내년에 15억달러를 지원하겠다고 발표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이라크에 자위대의 조기파견을 약속했다. 우리는 고이즈미가 왜 이러한 결단을 했는가를 한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13년째 계속되고 있는 경제불황과 다음달의 총선거를 앞두고 국내 여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정책을 지지해 왔다. 그 이유는 미.일동맹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는 것이 단순히 자기 정권만이 아니라 영구히 계속할 일본의 국가이익을 보전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략에 입각해 고이즈미는 일본이 이라크에서 미국을 돕는 것이 동맹의 임무를 다할 뿐 아니라 일본 자신의 장기적 안보, 경제 및 정치이익에 기여한다고 믿고 있다. 10년 전의 걸프전쟁 이후 일본이 겪은 경험과 현재 북한의 핵 위협 및 중국 국력의 급부상에 직면한 일본은 미국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길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데에는 최대 야당인 민주당과 여론도 동조하고 있다.

그런데도 각종 여론조사 결과는 일본 국민의 절반 이상이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을 의식한 고이즈미는 부시가 오기 전에 이라크에 제공할 15억달러 무상원조를 '주체적'으로 발표했다. 일본은 앞으로 4년간 세계은행이 추정한 5백50억달러의 복구비 중에서 약 10%에 해당하는 50억달러를 지출할 계획을 밝혔다.

돈만 내는 것이 아니라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1천여명의 자위대를 이라크 복구를 돕기 위해 '비전투지역'에 파견할 준비를 진행하고 있다. 이것은 1992년 제1차 이라크 전쟁에서 1백30억달러나 되는 최대 액수의 자금을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의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으로부터 '수표 외교'라는 핀잔을 받았을 때와 대조를 이룬다.

이번에도 미국이 유엔 결의 없이 이라크 전쟁을 수행한 데 대해 대부분의 일본 국내여론은 그것을 '일국주의'라고 비판해 왔다. 그러면서도 대다수의 일본인은 특히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지 않고 있는 이 시점에서 미.일동맹을 강화해야 한다는 데는 묵시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사실 고이즈미가 아태경제협력체(APEC)회의와 마드리드에서 있을 이라크 지원 국제회의에 앞서 50억달러 제공을 미리 제시한 것은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취해진 조치다.

이에 대해 야당과 일부 언론은 고이즈미가 부시에게 무조건 순종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그러나 고이즈미는 단순한 정치인(politician)을 넘어 일본의 장기적 이익과 국가위상을 도모하는 국가관리자(stateman)로서 지도력을 발휘하고 그 결과에 대해 책임지겠다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는 국내 경제의 구조개혁을 수행하는 데는 자민당 내의 저항으로 인해 빈번히 타협해 왔지만 외교안보정책에 대해서는 국가관리 차원에서 대미신뢰우선원칙을 일관되게 지켜왔다.

이에 대해 부시 대통령은 깊은 사의를 표시하고 있다. 그는 북한의 일본인 납치 문제에 대해 일본 입장을 지지했고 북한 핵문제에 대해서는 조기 6자회담 개최에 합의했다. 한편 그는 엔고를 막기 위해 일본이 달러 매입을 하고 있는 데 대해서도 압력은 가하지 않았고 다만 시장의 역할만 강조했다.

부시는 그가 방문할 아시아 6개국(필리핀.인도네시아.호주.싱가포르.태국) 중에서 맨 먼저 일본에 옴으로써 98년 빌 클린턴 대통령이 중국만 방문한 결과 당시 일본인들이 '일본 통과'(Japan Passing)를 당했다고 비난한 것과 달리 일본 중시 정책을 과시했다. 요컨대 고이즈미는 부시와의 정상회담을 통해 아시아에서 일본의 위상을 제고하고 있다.

안병준 일본 정책연구대학원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