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경진압도 광주사태 악화원인”/전씨 국회증언내용 요지/광주특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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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상황 한­미 인식차 있었다/최대통령 하야동기도 알수없다
◇10ㆍ26부터 12ㆍ12사태=10ㆍ26사건 직후 실시된 계엄은 지역계엄이었으므로 정부조직은 군의 통제하에 있지는 않았으나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 시해범으로 체포되고 주요 간부들도 조사를 받게되어 중앙정보부의 기능은 거의 마비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인이 보안사령관 취임직후 준비했던 합수부 계획이 비상계엄선포와 함께 계엄사령관을 경유하여 국방장관에 의해 결정되었다.
김재규의 체포경위는 대통령 시해사건 발생 직후 국방부에 국무위원 및 군 수뇌들이 모인 자리에서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이며 사건 현장을 목격한 김계원씨가 먼저 노재현 국방장관과 정승화 참모총장에게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것을 알려주었고 노 국방장관은 곧 저를 불러 김재규를 체포하라는 지시를 하며 정승화 총장을 만나 세부사항에 대한 지침을 받으라고 지시했다.
김재규의 계획은 박대통령을 암살하고 비상계엄을 선포케 한다음 군사혁명으로 유도,정총장을 비롯해 군고위층을 조정하여 정권을 탈취하려는 것이었다.
김재규의 진술에 의거하여 수사관들은 정승화 총장이 김재규의 공범내지 방조범 아니면 배후인물이라는 심증을 굳히고 10월27일 오전 11시쯤 본인에게 정총장을 연행,수사해야겠다는 건의를 해왔다.
본인은 처음엔 수사관들의 건의에 구두승인을 내렸다가 나라의 전반적 정세에 생각이 미쳐 그 승인을 일단 보류하기로 했다.
○정총장 강제연행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정승화 총장의 10ㆍ26시해사건 관련 의혹이 짙어만 갔다.
그무렵 항간에는 미국의 정보기관이 시해사건에 관련돼 있다는 풍문이 돌았고 본인을 살해하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첩보도 있었다. 한편 정총장은 계엄사령관이 된후 수도권 부대를 자기와 가까운 사람들이 장악하도록 했다.
정총장은 육군본부 주요 지휘관 회의등에서 3김씨의 자질과 자격을 비판하기 시작했는데 자기의 정치적 의도를 그런 식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수사의 총책임자로서 중대한 결심을 하지 않을수가 없었고 합수본부장으로서 대통령 시해사건이야말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수사에 성역이 없다는 신념하에 정확한 전모를 신명을 걸고 밝혀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을 느꼈다. 그때 남은 작업은 정총장의 혐의를 조사하여 그 의혹을 말끔히 없애는 일이었다.
본인은 본인의 신념과 군전체의 총의가 일치된 것으로 느끼고 12월초순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내각이 새로 발족한 후 김재규 재판과의 관련으로 보아 정총장에 대한 수사를 연기할수가 없다고 판단해 12월12일 임무를 결행하기로 했다. 12월12일로 날짜를 잡은것은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휴일동안 수사를 하고 조용히 마무리지을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저녁 본인은 합수부 수사요원을 총장공관으로 보내 정총장에게 수사에 협조하도록 전한후 모셔오도록 지시했다.
그런데 정총장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강제 연행을 하게 되었고 정총장이 총장공관을 경비하고 있던 헌병에게 발포명령을 내림으로써 수사요원이 희생되고 총격전이 벌어지는 불상사가 야기되었던 것이다.
○비극 상상도 못해
12ㆍ12사태는 시해사건의 수사도중에 발생한 우발적인 사건이었을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사전에 준비된 병력출동 계획도 없는 쿠데타가 어디 있겠으며 만약 쿠데타였다면 왜 본인이 그 직후 바로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겠는가.
대통령 시해사건의 수사를 맡은 책임자가 그 사건의 용의선상에 있는 사람을 수사하는데 있어 하극상이란 용어는 당치도 않다. 일단 용의자로 지목되면 상관이니 하위자니 하는 관계는 없어지고 용의자와 수사 책임자의 관계만이 남게되는 것이다.
◇광주사태=광주사태는 10ㆍ26이후 지속된 극심한 사회혼란의 연장선상에서 발생한 지극히 불행한 사태였다. 저는 사태발생 당시 정보의 총체적 책임자로서 초기 단계에는 쌍방간에 경미한 충돌이 있었으며 상황이 점차 악화되어 계엄사령부에서 무력진압을 계획중이라는 정보 보고를 들은바 있었으나 이처럼 엄청난 비극으로 확대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본인은 당시의 정보책임자로서 이 사태가 초동 진압단계에 있어서의 계엄군의 강경진압과 일부 출처를 알수없는 악의에 찬 유언비어에 자극받은 일부 시민들의 과격시위가 그 직접적인 원인이 된것이 아닌가하는 판단을 하고있었다.
○작전에 관여 안해
◇군부대 파견및 작전지휘=당시 광주사태와 관련된 계엄업무는 전국적인 계엄업무의 일환으로 계엄사령관이 주재하는 계엄관계관 일일회의에서 보고되고 논의되어 추진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중앙정보부장 서리인 본인은 그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 어떤 군지휘계통상의 간섭을 할수있는 위치에 있지않은 본인은 군의 배치ㆍ이동등 작전문제에 대해 관여한 사실이 없다.
또한 당시 지휘체제가 이원화되지 않았나 하는 의문이 제기된 것으로 압니다만 이 또한 일반적 군의 상식으로는 있을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어떠한 부대라 하더라도 일단 타부대에 작전배속이 되면 그 배속을 받은 지휘관은 즉각적으로 그 부대를 장악해 지휘할 책임이 있으며 그 이후의 모든 작전상 승패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입니다.
◇계엄군의 자위권 문제=자위권의 행사문제는 초기에는 군인 복무규율에 따라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행사된 것으로 판단되며 현지 상황이 더욱 악화됨에 따라 5월22일 자위권 발동도 가능하다는 계엄사령부의 작전지침이 지휘계통을 통해 하달된 것으로 알고있다.
◇미 정부의 역할=광주사태를 전후하여 주한 미대사관을 포함한 미국정부관리들은 한국의 제반상황에 대하여 우리측과는 어느정도 인식차이가 있었다고 보며 이러한 차이는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대해 제3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민해 있는 우리의 현실로 보아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최근에 미 국무부가 보내온 광주사태에 대한 석명서를 보면 당시의 한국안보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던것처럼 묘사되어 있으나 이는 당시 미 정부가 광주사태를 계기로 취한 일련의 군사ㆍ외교적 조치들과는 모순된 것으로 생각된다.
◇5월17일 전국비상계엄 확대조치=10ㆍ26이후 80년의 봄이되면서 우리사회에는 권력과 권위의 공동현상이 확실히 드러났고 거기에 발호하기 시작한 것이 혼란과 무질서였다.
한편 적화통일의 결정적 기회를 노리고 있던 북한은 이 시점이 되면서 대규모 기동훈련,전쟁물자 점검,전투태세 강화등 심상치않은 동향이 첩보사항으로 파악되고 있었다. 이같은 위기 상황에서 국가 자위조치의 당연한 귀결이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였다.
○대책회의서 결정
5월16일 최대통령 귀국 직후 국무총리,내무ㆍ국방장관,계엄사령관,그리고 본인등이 참석한 시국대책회의에서 총리는 국내상황을 종합적으로 보고하였고 주영복 국방장관은 이 자리에서 비상시국에 임한 군의 대책마련을 위해 다음날 전군 주요지휘관 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보고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5월17일 개최된 전군 지휘관회의에 참석한 지휘관들은 당시 사태의 심각성과 이에 대한 획기적 대책의 필요성에 의견을 같이하고 이를 위해 전국 비상계엄으로의 확대건의를 결의한 것으로 알고있다.
5ㆍ17비상계엄 확대조치가 12ㆍ12를 주도한 이른바 신군부세력의 쿠데타였다는 주장이 있습니다만 쿠데타가 국권을 탈취하기 위해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 국가를 치는 거사라 한다면 거기에 합당한 현상이 5ㆍ17시점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해두고자 한다.
○한시적 보좌기관
◇국보위 설치경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전국 비상계엄하에서 대통령의 계엄업무에 대한 지휘감독을 보좌하기 위해 계엄당국과 행정부간에 긴밀한 업무협조를 가능케하여 조속하게 사회안정기반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대통령 직속하에 한시적인 자문보좌기관으로 설치된 것이다.
나라를 벼랑으로까지 몰고간 위기상황은 전국 비상계엄을 불러왔고,전국 비상계엄은 무엇보다도 먼저 위기관리와 난국타개를 위해 정부기능을 보완적으로 강화할 수단을 찾지 않을수 없었으며,그 결과가 국보위 설치로 나타난 것이다.
◇최대통령 하야=본인으로서는 최대통령이 80년8월 하야하면서 발표한 성명의 내용에 비추어 헤아려볼수 있을뿐,그 이상의 다른 동기가 있었는지에 관해 저의 주관대로 추측해 말씀드리기는 어렵다는 점을 양해해 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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