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솔한 이 아침에(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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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천지신명께 비옵니다.
새날,새아침,목욕재계하고 진짜 생수 떠놓고,우리 마음,허공처럼 비우고 두손 싹싹 빕니다.
새해엔 더도 말고 고개나 쳐들고 살게 해주십시오. 눈만 뜨면 1노3김이요,5공이요,노사요,하고 한해가 가고,또 열두달이 지나고,벌써 이런 지가 몇해입니까. 발등만 내려다 보고 살기엔 눈앞의 절벽이 너무 높고,바깥세상의 변화가 너무 빠릅니다. 엊그제까지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매일같이 예사로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하루가 천년같다더니 그 말은 요즘 세상을 두고 하는 얘기같습니다.
지금은 그 음산하고 괴괴하기만 하던 공산세계까지도 감명을 주고 있습니다. 동유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어쩌면 그리 시원시원합니까.
도대체 나라의 간판을 갈아붙이는 일이 어디 손바닥 뒤집듯이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폴란드며,루마니아까지도 새 간판을 달고 있습니다. 민중의 힘에 밀려 마지못해 그런다지만 그 변화의 깊이와 폭도 엄청나고,지도자들의 진지한 표정들을 보면 구도자같이 보이지 않습니까.
세상에선 이처럼 천지개벽이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 주변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정치는 좁쌀같고,경제는 진흙탕같고,법은 어디 갔는지 강도들은 옹배기 속 물고기가 개울물을 만난듯이 날뛰고,사람들은 어디 한탕 할 일이 없나 하고 모두들 두리번 두리번 서성대는 표정들로 보입니다.
이것이 행여라도 대망의 90년대를 맞는 우리의 현실이라면 차라리 땅을 치고 주저앉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뚫어지게 신수를 보아도 훤한 구석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우선 새해부터 줄을 서고 있는 선거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 난장판들을 생각하면 벌써 현기증과 넌더리가 납니다. 내년의 지방자치단체선거,그 다음해의 단체장선거,그 다음 다음해의 국회의원선거,그 뒤의 대통령선거는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정치현실입니다.
천지신명께 아뢰오니,제발 새해,이 진솔한 아침에 우리의 청 하나 들어주시옵소서. 새해에는 더도 말고 우리의 입에서 새로운 소리 나오고,우리의 귀에는 새로운 소리 들려오게 해주소서. 우리의 머리와 마음에도 새 생각 좀 넣어주소서. 새 세상 좀 보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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