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 없는 빈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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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27일 오후 서울청량리 동산 성심병원 영안실에는 뒤늦게 몰려온 추위 속에 영정도 없는 빈소 3개 가 설렁하게 차려져 있었다.
이날 새벽 술 취한 손님의 발길질에 석유난로가 쓰러지면서 일어난 불로 숨진 이경숙씨(39·여)와 아들 황기정군(8·전곡국교1년), 딸 원미양(10·동3년) 일가족의 빈소.
불은 가게방에서 잠자던 아이들과 이들을 구하려 뛰어든 이씨는 몰론 영정으로 쓸 사진 한 장 조차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고스란히 태워버린 후에야 꺼졌다.
『처음 보는 회사원차림의 30대 술손님 2명과 주정 끝에 주먹다짐을 한 것밖에는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습니다』
중실화치사 혐의로 구속된 민병현씨(24·대학원생) 는 술김에 차 넘어뜨린 석유난로가 3명의 목숨을 앗아갔다는 사실이 여태 믿기지 않는 표정.
민씨는 26일 저녁 숨진 이씨가 경영하는 대학 호프에서 술을 마시며 TV를 보다가 루마니아의 차우셰스쿠 부부의 처형뉴스를 본 옆자리의 회사원 박모씨(30) 가 『우리 나라도 저런식으로 5공 청산을 해야한다』고 말하자 『말을 삼가라』며 시비 끝에 주먹다짐을 했고 석유난로를 차 넘어뜨렸다.
불이 나자 주인 이씨는 내실에서 잠자던 아들과 딸을 구하러 뛰어들었으나 거센 불길에 빠져 나오지 못하고 세모자는 서로 부둥켜 안은채 시커멓게 그을린 시체로 발견됐다.
4년 전에 병으로 남편을 잃고 아들딸 뒷바라지를 유일한 낙으로 삼으며 2년째 보증금 7백만원에 월세 11만원으로 7평 짜리 생맥주 집을 꾸려온 이씨.
서울시립대에서 2백여m 떨어진 생맥주 집이라 이씨는 늦은 밤까지 학생손님들의 술 주정을 받아내면서 혼자 사는 외로움을 달래 왔다.
『늘 말이 없다가도 아들이 백점 맞은 시험지를 받아올 때는 환한 얼굴로 자랑했었는데…』이씨 일가족의 어처구니없는 참변을 보고는 혀를 차는 이웃주민들.
『대가 끊겨 제사도 못 지낼 형편』이라며 장례형식을 놓고 머리를 맞댄 먼 친척들 사이로 『가난해서 못 먹은 것 하늘 나라에서라도 배불리 먹으라』며 원미양의 친구들이 신위에에 얹어놓은 우유봉지가 이날의 참사를 더욱 슬프게 했다. <이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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