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당·황순원 문학상 최종 후보작 지상중계 ⑤ 시 - 나희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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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아니, 누가 마흔 살 시인을 보고 원로래요?"

"거, 있잖아. 미래파 애들."

둘이서 한참을 웃었다. 하지만, 속없는 농담만은 아니었다. 지난해 새로운 화법을 장착한 젊은 시인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그리고 소위 '미래파'로 불리며 문단의 주목을 받으면서, 또래 시인 나희덕은 생각이 많았을 것이다.

벌써 등단 18년차다. 스무 해 가까이 시인은 한국 시단의 복판에 서있었다. 평단과 독자 모두 그를 지지하고 따랐다. 이태 전 다섯 번째 시집을 발표했을 때, 시인은 이미 당대를 대표하는 서정시인 중 하나였다.

아마도 그 세월 때문일 것이다. 올해 나희덕에서 변모의 몸짓을 읽는 건, 18년차 마흔 살 시인의 복잡한 심사가 시에서도 얼비친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에도 나희덕의 변화는 감지됐다. 지난해 여름, 시인은 "변화에 대한 갈망이 크지만 구체적인 출구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었다. 한동안 시를 안 쓰다가 서너 달 전에야 다시 시작했다고, 힘들게 말했었다. 지난해 미당문학상 최종심 후보에 올랐을 때 그의 작품 수는 7편에 불과했다.

그러나 올해는 21편이나 된다. 해를 넘긴 변화의 갈증이 어느 정도 가라앉은 것일까. 시인에게 물었다.

"변화하려는 지향성은 분명하지만 변화하고자 하는 지향점은 아직 없다. 익숙하고 편안했던 것으로부터 일단 벗어나고 싶었다. 시를 쓰는 과정 자체가 새로운 내가 형성되는 과정이 되었다."

시에서 시인이 보인다는 건, 다시 말해 흔들리고 갈등하는 시인이 시에 나타난다는 건 예심위원들이 한결같이 주목했던 부분이다. 김춘식 위원은 "하나의 세계를 형성했던 시인의 자의식이 해체되는 단계에 들어섰다"고 풀이했다.

앞서 실린 '분홍신을 신고'를 보자. 음악에 몸을 맡기자 시적 자아는 문지방을 넘고 식탁과 무덤을 지나 둑을 넘는다. 이윽고 내 속에서 실타래가 한없이 풀려나온다. 시인의 변화 의지가 읽히는 시편은, 이 말고도 여럿 더 있다. '7층과 8층 사이 7.5층의 어둠,/무의식의 다락방으로/다른 사람이 되기 위해 몰려드는 사람들'('존 말코비치 되기'부분)이나 '내 속의 자벌레가/네 속의 무당벌레에게 말을 건넨다'('대화'부분)와 같은 대목에선 자못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벽'이나 '방'따위의 시어가 자주 띄는 것도 '경계-넘기'에 대한 고심의 흔적일 터이다.

잘 빚은 항아리를 구워내던 시인이, 오늘은 손수 항아리를 깨고 있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대단하다. 항아리를 빚을 때나 항아리를 깰 때나, 시인을 향한 평단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다. 길어지고 어려워졌지만, 기꺼이 박수를 보낸다. 굳이 항아리를 깨는 이유를 "이미 완성된 체계에 안주하는 건 시인으로서 직무유기라고 생각했다"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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