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빠진 작업장…생산성 저조|노조간부 양재룡씨가 본 중국기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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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가까우면서도 먼 나라였던 중국.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상당수 인사들이 중국을 방문했다지만 근로자 신분으로는 처음 중국을 둘러보는 행운을 잡았다.
노동부가 주관한 근로자 대표들의 첫 중국 연수단 1진(노조간부22명)에 포함돼 11월초 1주일간 인구 11억의 나라를 방문, 소주·상해·북경의 유적지와 산업체를 돌아봤다.
소주에서는 종업원 3백명 규모의 자수공장 및 옥석 가공공장을 방문했다. 노동자들은 방문객이 있는데도 구석구석에 모여 잡담을 하는 등 작업에 열의가 없어 보였다. 사회주의체제가 지난 생산성의 한계를 보는 듯 했다.
공장은 거의 3교대 작업을 하며 노동자의 정년은 남자 60세, 여자 50세로 정년 후에는 보험으로 월 급여의 70%를 받는다고 했다.
농촌의 연소득은 1천5백원(한화 30만원), 공장노동자는 업종에 따라 연 6백∼2천7백원을 받고 있었다.
식량은 1인당 노동자는 30㎏, 사무관리직은 20㎏씩 티킷을 배급하며 약간의 돈을 낸다고 했다. 중국사람들은 누구나『잘먹고 산다』는 것을 자랑, 식생활에는 만족을 보였다.
그러나 의복은 허름했고 공장노동자들은 가족1인당 1.2∼1.5평씩 분배되는 비좁은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아파트에 입주할 돈이 없으면 셋방에 사는 경우도 있었다. 개인재산은 주택과 상업권 정도 인정하나 땅은 국유였다.
북경에서는 종업원 9천명의 제일 선반기 공장을 방문했다. 임금은 높았으나 헬멧·안전화등도 없고 맨손으로 일해 산업안전에 아직 소홀한 느낌이었다.
노동조합이 있느냐는 질문에『있다』며 공회라는 이름이라고 했다. 공회가 하는 일을 묻자 근로평가·승진승급·후생복지 등이라며 구체적 답변은 피해 우리와 같은 적극적 기능이 아닌 것으로 판단됐다.
북경의 제2면방직 공장을 견학했을 때는 면사연 2만6천t, 직물 연7천6백만t의 생산품 중80%를 수출한다는 실명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국적으로 따지면 큰 물량이 될 것이어서 우리 방직 업계로는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중국에서는 숙련노동자의 봉급이 의사·교수·관리직 등에 못지 않은 것이 특색이었으나 생산직 학력은 중·고교 졸이었고 대졸자는 관리직에 근무했다.
오늘의 중국인들이 제일 부러워하는 직업은 상업으로, 허가를 받아 1년 정도 장사하면 일제 승용차를 굴릴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사농공상 정신이 남아있어 화이트 칼러들이 전직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중국은 우리보다 많이 뒤떨어져 있으나 풍부한 자원, 많은 인력, 관광 자원, 넓은 영토 등 사다의 나라인 만큼 활성화되면 곧 우리를 뒤쫓아 올 수 있는, 방심해서는 안 될 존재로 생각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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