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전 남로당 지하총책 박갑동씨 사상편력 회상기|제2부 해방정국의 좌우대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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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내가 정계진출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고 있던 8월말쯤 때마침 김형기·하태·정봉식이 김창숙 선생을 모시고 서울로 왔다.
해방당시 심산(김창숙의 호)은 일경의 모진 고문 탓에 병을 얻어 울산의 한 암자에서 요양하고 있었는데 하반신을 많이 다쳐 거의 거동을 못했기 때문에 아들 형기가 업고 왔다.
이러한 심산을 굳이 서울로 모셔온 것은 해방 후 정치가라는 정치가는 모두 서울에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곧 종로 화신백화점 뒤편의 전동여관으로 심산을 찾아갔다. 나를 처음 만나는 심산은 형기로부터 나의 소개를 듣고 친가족처럼 대해주었다.
그 뒤로부터 나는 심산 방에 무상 출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심산은 만나도 그때까지 나의 가슴 한구석에 늘 자리잡고 있는 몽양과 박헌영은 아직 만나지 않고 있었다.
몽양을 찾아가려고 이우적에게 의논하니 『나도 아직 몽양에게 인사를 못했으니 같이 가자』 고 했다. 그는 몽양 밑에서 조선 중앙일보사에 잠깐 있었던 일이 있었다. 종로 2가에 있던 건준사무실의 몽양방에 들어서니 역시 사람이 가득 차있었다.
그의 주위에는 언제든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다. 나는 그의 뛰어난 품채와 언변을 대할 때마다 그는 타고난 정치가라고 생각하곤 했다. 그는 이우적보다 나에게 더 관심을 돌려 곧 자기한테 와서 일을 함께 하자고 말했다. 나는 이우적의 얼굴을 봤다. 그는 동의하지 않는 빛이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심산의 얼굴이 떠올랐다. 심산이 몽양을 불신하고 있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나는 확답을 피하고 일어섰다. 그때 코끝이 약간 붉은 신사가 들어왔다.
이우적이 『안 선생님!』하고 인사를 했다. 나는 그가 곧 안재홍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도 따라서 인사하며 『안 선생님의 저서를 와세다대학 도서관에서 읽은 일이 있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아! 내책이 와세다대학 도서관에 있던가?』하고 아주 좋아하며 나에 대해서 자세히 물었다.
안재홍은 와세다대학 정경과를 졸업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1950년 봄에 남로당 지하당 지휘부가 붕괴됐을 때 남로당 지하당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일루의 희망을 건 것은 안재홍이었다.
나와 이우적이 몽양을 찾아갔을 때는 몽양을 중심으로 한 건준이 활발히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최초의 건준 지도부는 위원장 여운형, 부위원장 안재홍, 총무 최근우, 조직부 정백, 선전부 조동우, 무예부 권태석, 재정부 이규갑 등으로 되어 있었다. 이 구성은 여운형파, 안재홍파, 장안파 공산당 등 3파의 합작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공통점은 몽양을 제외하고는 독립전선에서 떨어져 있었던 사람들이다. 해방 직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다들 좌익인체 하던 시대였다.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하자 조선에 와있던 일본 식민지 통치자들은 조선사람 중에서 누가 자기들에 대한 보복을 방지하고 자기들의 생명과 재산을 가장 잘 보호해줄 수 있겠는가를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희망은 김성수와 여운형에게 걸었을 것이다.
결국 그것을 여운형이 받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치안유지와 식량 배급하는 일인데 여운형은 다른 목적으로 이것을 건국 준비 위원회라 하여 자기와 개인적으로 친한 사람들을 모았다.
이에 대해 김성수-목진우파는 외부에서 건준의 반대 타도운동을 시작했고 박헌영은 내부로부터 개조를 추진하려 했다. 여·안·장안 삼파는 이러한 내외의 공격에 버텨내지 못해 결국 8월22일 건준 조직의 1차 개조를 하고 다음과 같이 김성수파와 박헌영파를 가미했다.
김성수파의 김준연을 기획부장, 함상훈을 문화부 부부장으로, 박헌영파의 이강국을 건설부장, 박문규를 기획부 부부장으로 임명했다.
그대신 친 여운형파를 많이 늘리고 안재홍파도 권태휘를 교통부 차장으로, 양재하를 건설부 차장으로 등용했다. 또한 특징적인 것은 철저한 반 박헌영파 공산주의자인 고경흠과 최성환이 서기국을 장악한 것이다.
그런데 건준의 부위원장을 맡고 있던 안재홍이 8월31일 그동안 형식적 대우를 받아오던 부위원장 자리를 물러났다.
민세(안재홍의 호)가 건준을 떠나게 된 것은 당시 그와 친분이 있던 우익인사들이 그에게 건준 안에 공산주의자들이 많고 또 그들이·주도권을 쥐고 있으니 우익계도 위원 수를 늘려 좌익계를 견제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건준에서 탈퇴하도록 압력을 가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민세가 우익편중의 확대위원 1백35명을 선정해놓고 몽양에게 회의소집을 요구, 둘 사이에 마찰이 빚어졌다.
이에 몽양은 타협안으로 그들 확대위원에게는 발언권을 줄 수 없다고 하자 민세는 크게 불만을 표시한 뒤 사퇴를 선언했던 것이다.
몽양은 9월3일 민세 대신 허헌을 부위원장으로 임명, 부서를 다시 개편해 공산주의자 일색으로 건준을 꾸몄다.
이로써 건준은 여운형·박헌영파의 합작으로 운영되어 가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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