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파는 처녀」가 막은 고향방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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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천만 이산가족의 고통을 덜어줄 것으로 기대를 모았던 남북고향 방문단 교환문제가 타결일보 직전에서 또다시 좌초됐다.
이로써 오는 12월 8일로 예정된 제2차 고향방문단 교환과 12월 15일의 제11차 적십자 본 회담도 연기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고향방문단 예술단 교환문제는 북한측도 열을 올리던 사업이라 어느 남북회담보다 성사 가능성이 높았는데 이것 마저 무산되어 앞으로 체육회담·고위당국자 회담·예비회담·국회회담 등도 상당기간 전도가 어둡다.
21일 열린 실무대표 접촉에서 우리측은 고향 방문단 및 예술단 교환의 마지막 걸림돌로 남아있던 예술단규모를 북측 의견을 그대로 수용, 총 5백71명(단장 1, 기자단 30, 수행원40명 포함)의 범위 내에서 상호 편의에 따라 결정하자는 데 합의했다.
우리측은 이미 북한이 최근 베를린장벽 철거와 동구의 개방 및 자유화물결에 충격을 받아 고향방문단 교환을 기피하려 한다는 의중을 읽고 있었다. 따라서 결렬의 핑계를 주지 않는다는 목표아래 회담의 최대 난관인 예술단 규모문제에서 북측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날 회담이 갈 풀려나가는 듯이 보여 회담 장 주변을 술렁이게 했다.
그러나 북한측은 예술단 규모 문제가 회담시작 15분만에 타결되고 세부절차 논의에 들어가자 일일이 제동을 걸며 속셈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날까지 양측이 합의한 ▲선 고향방문단 교환 후 적십자 본 회담개최(3차) ▲방문지를 서울과 평양에 국한 ▲방문기간 3박4일 ▲기자단 30명, 지원인원 40명(이상 4차) ▲예술단 공연 TV실황 중계(5차) ▲방문단 규모 ▲공연내용 원칙 및 공연형식 등 7개항의 합의내용은 모두 우리측의 일방적 양보로 이루어진 것이다.
북한측이 양보한 내용은 예술단 규모를 당초 3백 명에서 2백 명으로 줄인 것뿐이다.
우리측은 12월8일까지 시일이 촉박한 만큼 공연내용과 형식, 공연횟수와 시간 등의 세부절차문제를 지난 85년 9월의 1차 고향방문단 교환 때의 선례에 따라 일괄타결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북한측은 딴판이었다. 공연 내용의 원칙을 새로 정립하자는 것이었다. 즉 공연내용을 민속적인 것, 건전한 내용, 상대방을 비방·중상하지 않는 것으로 하자고 제의했다. 우리측이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는다」는 구절도 삽입시키자고 주장하자 북측은 「비방·중상하지 않는다」는 말속에 포함돼 있는 것이라며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했다.
북한측은 또 예술단의 공연시간을 굳이 3시간으로 고집하고 공연횟수도 4회로 늘리자고 주장했다.
특히 북측은 이날 지금까지 언급을 회피했던 자신들의 혁명가극『꽃 파는 처녀』와『피바다』를 공연하겠다고 공공연히 들고 나와 회담타결에 새로운 난관을 조성했다.
『꽃 파는 처녀』는 북측이 자신들의 최고 수준의 예술이라고 자랑하는 이른바「혁명가극」이다.
우리측이 『꽃 파는 처녀』의 공연에 반대할 것이라고 북측은 충분히 짐작했을 것이다. 정부는 우리 대학생들의 『꽃 파는 처녀』 『피바다』등의 공연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단속한바 있어 북의 공연을 허용할 경우 일관성을 잃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북측의 고향방문단 성사의지를 의심케 하는 징후는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단적으로 이날 고향 방문단을 서울·평양 출신 위주로 하자는 것이 그 예다. 또 지난 15일 고위당국자 회담 예비회담에서 다음 회담 일정을 잡으면서 북측은 고향방문단 교환 하루전인 12월7일 또는 하루 후인 12월9일로 하자고 제의, 간접적으로 고향방문단 교환을 하지 않겠다는 뜻을 비쳤다.
남북회담의 관례상 이번처럼 우리측이 대폭 양보한 적도 없다. 북측 박영수 단장도 이를 인정하듯 21일 기자회견에서는 다른 때의 자신만만하던 태도와는 달리 질문도 받지 않고 허둥지둥 자리를 떴다.
결국 북측은 남북교류를 하기에는 내부적으로 정리해야할 문제가 많아 아직 시기상조라고 판단하는 듯 하다. 실제 북측은 비공식 접촉에서 방문단교환을 내년 5월께로 미루자는 언질을 비치고있다.
따라서 오는 일의 7차 접촉에서 우리측이 내부적 어려움을 감수하면서『꽃 파는 처녀』의 공연을 허용한다 하더라도 문익환 목사와 임수경 양 석방문제를 들고 나와 또다시 무산시킬 가능성이 크다. <김두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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