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에세이] 고이즈미, 정적과 영원한 작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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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 도쿄 특파원

내각·자민당 합동 장례식장

8일 도쿄 무도관에서 열린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郞.69세) 전 총리의 내각.자민당 합동 장례식장(사진).

장례 행렬 선두에서 식장으로 입장하는 장례준비위원장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64) 총리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정면에는 그의 오랜 정적(政敵)이었던 하시모토 전 총리가 대형 영정 속에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수십 년간의 정적을 저 세상으로 보내면서 자신이 장례준비위원장이 된 아이러니에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던 것일까.

1995년 자민당 총재직을 걸고 붙었던 1차전은 하시모토의 압승. 그러나 2001년 치러진 2차전은 고이즈미의 승리였다. 철의 결속을 자랑하던 다나카(田中)파의 계승자 하시모토 전 총리, 그리고 다나카파의 영원한 라이벌 후쿠다(福田)파의 계보를 잇는 고이즈미 총리는 그렇게 서로를 견제하며 살아왔다.

고이즈미 총리의 최대 목표는 자민당 최대 파벌인 하시모토파를 붕괴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총리 취임 후 늘 '개혁 저항 세력'이라고 몰아붙인 것도 하시모토파였다. 지난해의 우정민영화 법안 통과 강행과 총선거 실시도 어찌보면 우정족(族)이 다수 포진한 하시모토파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성공으로 끝났다. 하지만 그 같은 일련의 과정에서 병을 얻은 것인지 하시모토 전 총리는 지난달 1일 급서하고 말았다.

"원수도 죽으면 다 신이 된다"는 일본 국민의 가치관 때문인지 고이즈미 총리가 이번 장례식에 쏟은 정성은 각별했다. 각 지자체와 공립학교로 하여금 조기를 게양하고 공적 기관에서는 묵념을 올리도록 했다. 이날 장례식장에도 아베 신조(安倍晉三) 관방장관.아소 다로(生太郞) 외상 등 다른 각료들보다 일찍, 행사 시작 20분 전에 도착해 유족을 챙겼다.

나머지 임기 1개월여. 떠날 날이 멀지 않아서인지 고이즈미 총리는 부쩍 자신이 '적'으로 돌렸던 이들을 챙긴다. 지난해 총선 때 내쫓았던 '우정민영화 반대세력'을 다시 포용할 의사도 내비치고 있다. 그렇다면 등 돌린 이웃 나라와는 어떻게 화해할 것인가. 그건 이날 장례식이 열린 무도관의 바로 맞은 편 야스쿠니(靖國)신사에서 결판난다. 15일 그가 나타나는지에 달려 있다.

김현기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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