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사스 공포' 확산

중앙일보

입력

홍콩인들은 8일 사스(SARS.중증 급성 호흡기증후군)의 무서움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임신 7개월째인 궈(郭)모씨의 부인이 전날 통증 끝에 제왕절개 수술을 받았으나, 태아의 폐가 70% 가량 시꺼멓게 변해 인큐베이터에 들어갔다는 뉴스를 접한 것이다.

산모 가족은 지난 1일 홍콩 정부가 '특별 격리 수용 조치'를 내렸던 아모이 가든 아파트에서 살다가 일가족 3명과 인도네시아 출신 가정부가 사스에 걸리는 비운을 당했다.

홍콩 정부는 부랴부랴 임신 13주(週)이하의 모든 임신부 공무원들에게 특별 휴가령을 내리는 소동을 빚었다. 노동단체에선 "모든 임신부에게 특별휴가를 달라"고 요구하고 나섰다.

이날 낮 홍콩 섬의 노스 포인트에 있는 홍콩 빈의관(殯儀館.장례식장). 홍콩 영화계의 수퍼스타였던 장궈룽(張國榮.46)의 시신을 싣고 화장장을 향하는 50여대의 차량 행렬이 천천히 움직였다.

대형 사진을 앞세운 장례 차량이 출발하는 순간 건물 주변의 여성 팬 1천여명은 울음을 터뜨렸다. 張의 사진을 품에 꼭 안고 있던 에바(27)는 그의 애칭인 '거거(哥哥.형이란 뜻)'를 목놓아 외쳤다. 그녀는 "거거의 자살을 믿을 수 없다"면서 "영원히 거거를 사랑할 것"이라며 발을 굴렀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사스의 공포는 예외가 아니었다. 1만여명의 애도객들은 마스크를 쓴 채 긴장감을 감추지 않았다. 사스 환자가 9백명에 이른 마당에 누가 누구를 감염시킬지 모르는 현실이 피부로 느껴졌다.

홍콩인들은 張의 급작스러운 투신 자살과 사스 확산으로 암울해지는 홍콩의 미래를 연결시켜 말하곤 한다.

60대 초반의 택시기사인 류쥔슝(劉俊雄)은 "사스의 상처를 이겨내려면 최소한 6개월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외출을 기피하는 바람에 하루 수입도 평소보다 30%가량 줄어든 8백홍콩달러(약 12만8천원)에 불과하다는 한탄도 잊지 않았다.

홍콩 사회는 일주일 전부터 공황 상태에 빠졌다. 백화점.쇼핑가는 손님이 절반도 안되는 수준으로 뚝 떨어지고, 음식점.영화관.노래방은 아예 '개점 휴업'이나 마찬가지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코즈웨이 베이와 침사초이의 번화가 역시 직격탄을 맞고 있다.

모두들 일찍 귀가하는 바람에 수퍼마켓의 계산대엔 저녁마다 인산인해다. 외식보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음.식료품과 생필품 쇼핑이 늘어난 것이다.

그중에서도 사람과의 접촉을 두려워하는 '사스 증후군'은 이미 생활 속으로 파고들었다. 오죽하면 홍콩TV들이 "악수를 하지 말고 중국식으로 두 손을 모아 흔드는 인사법을 쓰라"고 권할 지경이다. 재택근무를 실시하는 직장도 늘고 있다.

여기에다 사스 감염자가 수십명에 이르는 홍콩의 옆동네인 중국의 선전(深)에서 미국인 교사 1명과 캐나다 국적의 화교 부부 등 3명의 외국인이 사스에 감염됐다는 소식까지 더해져 살벌한 분위기를 더해주고 있다.

홍콩 정부는 사스 환자가 이달 말까지 최고 3천명까지 늘어날 수 있다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대책 마련에 나섰다. 총리격인 둥젠화(董建華)행정수반이 사스에 감염되는 비상사태까지 거론 중이다.

하지만 사스의 공포 속에서도 홍콩인들의 저력은 발휘되고 있다. 사스에 감염됐다가 완치된 20여명의 의사.간호사들이 '사스 전선'으로 다시 뛰어드는 용기를 과시했다.

지난 주말 사스 감염자가 폭증했던 아모이 가든 아파트의 주민 3백여명은 질서있게 '엿새간의 격리 수용'을 끝내고 귀가했다.

홍콩의 위생서 양바이셴(梁栢賢) 부(副)서장은 "사스에 대한 공포심이 최대의 적"이라며 "9백28명의 감염자 중 1백27명은 완치됐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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