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취재] 下. 설 땅 없는 자폐 성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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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복지법상 장애 등급은 1~6급으로 나뉜다. 이 중 자폐증은 가장 중증인 1~3등급으로만 분류된다.

그만큼 자폐는 심각한 장애다.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어려울수록 도움의 손길은 더 필요한 법.

그러나 자폐 장애인들은 더 냉대를 받는다. 기업들은 '일 시키기가 어렵다' 고 채용을 꺼리고, 보호시설들은 '돌보기가 힘들다' 며 외면한다.

◇ 일생을 따라다니는 멍에=자신이 자폐 장애인인지도 모른 채 평생을 살아온 한모(45.여)씨. 나이를 물어보면 답은 언제나 '열아홉' 이다.

한씨는 홀어머니와 단 둘이 줄곧 살았으나 어머니가 일흔을 넘기며 신경통으로 더는 살림을 할 수 없게 되자 3년 전 어머니와 함께 결혼한 남동생 집으로 옮겼다.

갑자기 아픈 시어머니.시누이를 맞게 된 남동생 부인은 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됐다.

고민 끝에 남동생은 한씨를 서울 강동구에 있는 소규모 장애인 시설에 맡겼다. 석달 전 이 시설에 입주한 한씨는 처음엔 '집에 가고 싶다' 며 매일 보따리를 쌌다.

이젠 체념했으나 낯선 공동생활에 적응하기는 여전히 힘겹다. 매달 10여만원씩 내는 생활비는 남동생의 몫이 됐다.

자폐 성인 8명이 함께 사는 경기도 포천에 있는 비인가 '그룹 홈' (공동생활가정).

부모들이 매달 50만원씩 내 운영하는 이곳엔 20세부터 44세까지 산다. 40대 자폐 아들을 70세 할머니가 부양하는 실정이다.

자폐 성인 김모(30)씨의 삶의 목표는 결혼. 사귀는 여자 친구도 있다. 같은 장애인인데 이 때문에 양가 부모가 반대, 눈물로 지샌다.

◇ 취업하기는 '별 따기' 보다 힘들다=서울 보라매공원 안에 있는 정신지체인복지관은 3년 코스의 직업재활과정을 운영한다.

이를 마치면 취업을 알선하고, 취직이 되면 복지관 직원이 일정 기간 장애인과 함께 출근하면서 적응할 때까지 현장에서 보살핀다.

이처럼 정성을 다해도 6개월을 못다니고 내쫓기기 일쑤다. 최선자 직업재활팀장은 "한 명을 제대로 취업시키려면 보통 서너 곳은 거쳐야 한다" 고 말했다.

자폐 장애인들은 취업 자체가 어렵거니와, 설사 일자리를 잡는다 해도 대부분 영세업체다. 월급은 평균 40만~50만원에 불과하다.

월급을 많이 주는 대기업일수록 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장애인 채용을 꺼리는 경향이 있는 데다 채용을 해도 경증 장애인을 선호해 자폐인에게까지는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다.

◇ 절대적으로 부족한 자폐 성인 시설=서울 노원구 '동천의 집' 이 낮시간 동안 운영하는 주간보호센터는 정원이 10명인데 현재 32명을 돌보고 있다.

부모가 울며 매달려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 그러나 정부 지원금은 정원이 기준이어서 살림이 어렵다.

성선경 원장은 "잠시나마 부모의 고통을 덜어주려면 단기.주간보호시설부터 대폭 늘려야 한다" 고 말했다.

최근 장애인들끼리 4~5명에서 10명 단위로 아파트나 가정집을 세내 정부.지자체의 지원을 받으며 소규모 공동생활을 하는 그룹 홈이 자폐 성인을 둔 부모들의 새 희망이 되고 있다.

그러나 예산 문제로 서울시의 경우 지원 대상을 67곳(2백76명 수용)에서 더 늘리지 못하고 있으며, 지방 시.도는 이보다 훨씬 적다.

◇ 그래도 희망은 있다=초등학교 입학 전 지능지수(IQ)가 70이었던 박윤서(26)씨. 그는 요즘 자폐아 교육기관인 서울 수서동 밀알연구소에서 간사로 일한다.

성공회대 졸업 후 대학원(인천 성산효도대학원)도 장학생으로 졸업했다. 아이들 수업 보조자료 작성을 맡아오다 올 봄부턴 강의 조교도 맡았다.

그는 다음달 부모 품을 떠나 독립할 예정이다. 하지만 완전한 홀로서기는 안돼 일단 직장 상사와 자취를 할 계획.

어머니인 이숙형 성광유치원장은 "결혼반지까지 팔아 학교를 보내 초.중.고교 12년을 개근시켰다" 며 "하도 힘들어 자살 충동을 수없이 느꼈으나 '후배' 자폐아들에게 절망을 주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고 말했다.

서울 구로공단 내 한국음향에 9년째 다니는 이정근(33)씨는 오전 6시 출근, 오후 9시30분 퇴근의 고된 일과를 묵묵히 참아낸다. 직장에선 다른 동료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으며 모범상도 여러 차례 받았다.

아들이 자폐아인 선우담 목사는 "부모들부터 창피하다는 생각을 떨치고 아이가 세상 속으로 과감히 발을 내딛도록 끊임없이 도전해야 한다" 고 말했다.

◇ 정부.사회가 나서야=교육(교육부).직업훈련(노동부).복지(보건복지부) 등으로 소관 부처가 달라 연계 교육.훈련이 안되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전문가들은 장애 유형별.나이별로 맞춤 서비스를 하는 선진형 복지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일반인의 이해와 관심도 중요하다. 문용수 서울시립정신지체인복지관 사무국장은 "장애 유형과 특성을 교과서에 실어 자라나는 일반 아이들이 '함께 사는 법' 을 배우게 하자" 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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