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경 헤매던 백혈병 환자 서울대 박사 되다

중앙일보

입력

백혈병이 재발해 사경을 헤맸던 환자가 박사학위를 받는다.

26일 서울대에서 '돼지편충의 면역효소측정법 개발' 이란 논문으로 수의학 박사 학위를 받는 이종경(46.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씨.

李씨의 논문은 돼지의 똥에 있는 기생충 알을 검사자가 눈으로 확인하던 기존 진단법에 비해 훨씬 정확하고 편리하게 편충 감염 여부를 알아낼 수 있는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백혈병 환자도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

1991년 성기가 붓고 아파 응급실을 찾은 李씨에게 내려진 진단은 뜻밖에도 백혈병. 수의대 재학 시절 미식축구 선수였을 정도로 강인한 체력을 과시했던 그에게 '길어야 3년' 이란 의사의 말은 청천벽력이었다. 다행히 동생과 골수형이 일치해 92년 골수이식 수술을 받았지만 6개월 만에 재발했다.

수술 후 재발은 백혈병 환자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마지막 희망을 건 것은 당시 미국에서 임상시험 중이던 '골수공여자 T세포 주입법' . 국내 최초로 동생의 혈액에서 T세포만 골라내 항암제와 함께 투여하는 이 방법을 성모병원 김춘추 교수에게 시술받았다. 9년째 재발이 없는 그는 현재 백혈병 재발 환자로는 국내 최장수 생존자라는 기록을 갖고 있다.

李씨의 인간 승리는 독실한 신앙심과 가족의 배려에서 비롯됐다.

"골수이식 수술 등에 1억원이나 되는 치료비가 들었고 극심한 피로 등 부작용이 심한 인터페론 주사를 8년 동안 맞았지만 기도와 사랑으로 이겨냈습니다. "

안양 중앙시장에서 20년간 과일 행상을 해온 어머니와 중경고 교사인 아내의 도움이 컸다.

李씨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직장생활을 게을리 하지 않아 한국화이자의 영업부장까지 맡았다.

그는 "명색이 세일즈를 담당하는 영업부장이었는데 술과 담배를 일절 하지 않아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기도 했지만 영업 목표의 1백5%를 달성해 포상으로 가족들과 함께 태국에 다녀오기도 했다" 고 털어놨다.

그러나 IMF 이후 동생의 사업이 부도나면서 치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자의반 타의반 명예퇴직을 해야 했다. 그는 최근 금천구 독산동에 사무실을 임대해 가축용 자동주사기 수입업체를 차렸다. 매출을 기약할 수 없고 직원도 없는 '나홀로 사장' 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을 회장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에 항상 든든하다" 고 말했다. 그의 꿈은 의사가 돼 선교활동을 하겠다는 것. 그는 "늦었지만 의대에 편입하기 위해 고2 아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며 겸연쩍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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