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가게] "헌 물건 구입 눈치 보는건 낡은 생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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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나는 1991년 한해 영국 런던에서 유학생활을 한 적이 있다. 그 시절 많은 추억을 회고하는 즐거움은 지금도 나를 미소짓게 한다. 그 가운데 잊을 수 없는 추억은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런던 시내에 열리던 벼룩시장에 관한 것이다.

끝에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벼룩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가구나 전자제품 같은 큰 물건에서부터 그 옛날 귀부인이 오페라극장에서 사용했음직한 망원경, 19세기인지 그 어느 때인지 제작됐을 것 같은 지도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눈요기를 제공했다.

심지어 여성 속옷까지 있어 나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다.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나에게 그곳은 다양한 생활용품을 구입할 수 있었던 알뜰 장터였다.

드디어 우리나라에서도 오는 11월 8일과 9일 잠실 올림픽경기장에서 '지상 최대의 벼룩시장'이 열린다. 아름다운가게와 서울시가 주최하고 중앙일보.MBC 등이 후원하는 이 행사는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적인 것이 될 것이다.

잠실 올림픽경기장처럼 넓은 곳에서 수많은 기업과 공공기관.시민들이 참여하고 어린이 벼룩시장, 정크 아트(폐품을 이용한 예술), 환경디자인 전시 등 다양한 볼거리가 동시에 마련된 적은 없었다. "런던의 거대한 벼룩시장을 이제 이 땅에서도 볼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와 환희가 교차한다.

자신에게 필요없는 헌 물건을 내다 팔거나 자선과 공익을 위해 기부하는 행위, 필요한 헌 물건을 사가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행위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그런 단순한 행동이 어색하거나 남의 눈치가 보였다. 심지어 헌 물건을 사는 것이 "재수가 없다"거나 "품위에 어긋나는 일"처럼 인식됐다. 반짝거리는 새 물건이 아니면 어느 자리에도 끼지 못했다. 집집마다 새 물건 같은 헌 물건이 빼곡히 쌓여만 갔다.

두 자리 숫자의 성장을 기록하던 과거 '개발독재'시대에는 이렇게 좋고 비싼 새 물건을 사고 소비하는 것이 미덕이었다. 비싸고 새로운 물건의 구매는 유행병 같이 우리 행동양식과 사고방식을 지배해왔다. 천민자본주의의 시대였다. 우리는 바로 그런 시대를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달라져야 한다. 아니 달라지고 있다. 2003년 중앙일보 10대 사업으로 아름다운가게 캠페인이 선정된 뒤 집중 보도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기증품을 보내오거나 자원활동을 하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중앙일보를 보고 매장을 선뜻 기증해 주신 분, 30년간 시계 수리를 해온 경험을 아름다운가게를 위해 쓰고 싶다는 분 등은 아름다운가게에 큰 힘이 되고 있다.

또 물건을 사러 오면서 헌 물건을 가져와서 기부하고, 자신에게 필요한 물건을 조심스레 고르고, 기증된 헌 물건을 수선하고 판매하는 일에 한 푼 대가도 없이 자신의 열정과 시간을 바치는 사람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이제 우리는 외형의 부와 사치의 경쟁을 넘어서 보다 검소하고 질박한 시대, 성숙한 사회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바로 오는 11월 8~9일 잠실 올림픽경기장에 모여든 헌 물건과 인파가 그 도도한 시대의 흐름을 더욱 확실하게 증명할 것이다.

아름다운가게 상임이사 박원순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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