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몸도 마음도 고달픈 「고 3 교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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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지난 5월 서울 한강로의 한 고층아파트에서 2O대 미혼여교사가 투신자살했다. 숨진 여교사는 교단경력 4년째의 서울 모 여고 이모 교사(26).
이 사건은 학교측과 가족들이 쉬쉬하는 가운데 단순 자살사건으로 처리돼 일반에 알려지지 않은 채 묻혀지고 말았지만 동료교사들은 「과중한 수업부담감」이 이 교사를 죽음으로 내몬 주된 이유중의 하나라며 충격을 씻지 못하고 있다.
이 교사 담당은 국어. 지난해까지만 해도 1, 2학년을 맡았으나 올해부터 2학년 담임을 하면서 3학년 수업까지 겹치기로 해왔다.
이 때문에 이 교사는 갈수록 건강이 악화, 자살 전날에는 과로로 몸져누워 결근을 해야했다.
특히 고3 수업에 대한 중압감에 시달려오다 자살 이틀 전 퇴근길에서는 동료교사에게 『고3 수업이 그렇게 힘들 줄 몰랐다. 죽고싶다』고 호소했다고 한다.
서울 D여고 3학년 박모 교사(35)도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이 교사와 같은 중압감에 시달리고 있다.
박 교사의 하루는 오전 6시 2O분 출근길의 「샛별보기로 시작된다. 학교 도착은 오전 7시30분. 하루 평균수업은 정규·보충수업을 합쳐 5∼6시간. 규정대로라면 1주일동안 정규수업20시간이면 족하다.
그러나 보충수업 9시간을 더해야 하고 특별활동·체육등 비입시 교과목 시간을 편법으로 전용한 추가수업 3시간을 합치면 1주일동안 무려 30시간을 교단에 서야한다.
더욱이 방과후 자율학습 감독까지 하는 날은 오후 10시 30분까지 꼬박 15∼l6시간을 학교에 매달려 귀가하면 녹아 떨어지고 만다. 『고3 수업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고속버스를 타고 가며 차안에서 계속 물건을 파는 것과 같다』는 박 교사는 『오후 보충수업 시간에는 피로가 겹쳐 자고싶은 생각밖에 나지 않는다』고 고충을 털어놨다.
학생 면담도 고3 교사에게는 수업에 못지 않은 중요 업무. 매달 정기 모의고사 후 점심시간이나 방과후 시간을 이용, 면담을 하지만 60명에 가까운 학생을 일일이 만나는 데도 꼬박 1주일이 걸려 빠듯한 교사들의 하루를 더욱 부담과 피로로 가중시킨다.
E고 이모 교사(42)는 이 때문에 올해 3학년을 맡고부터 도저히 체력을 감당 못해 지난 여름방학에는 보약을 달여 먹었다.
이 교사뿐 아니라 상당수의 고3 교사들이 만성위장병 등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육체적으로 지친 고3 교사들을 정신적으로 더욱 옥죄는 것은 『성적을 올리라』는 끊임없는 학교측의 독촉.
명문대학 진학률이 곧바로 학교우열로 판가름나는 우리의 교육풍토에서 교장·교감의 성화는 교사들을 한결 고달프게 한다.
『입시가 가까워 올수록 부담이 커지고 내자신도 어느덧 가르치는 선생이 아니라 학생과마찬가지로 점수벌레가 되고 만다』는 고3 교사들.
전국적으로 매달 모의고사를 치르고 나면 학생개인은 물론 학급의 우열이 판가름나기 때문에 1점이라도 더 학급성적을 끌어올리기 위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
학급성적은 곧 교사자신의 능력을 평가받는 가늠자.
『어쩌다 모의고사에서 학급성적이 꼴찌라도 할 때는 정말 학교 나오기가 죽기보다 싫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면 교장의 질책이 비수가 돼 가슴에 박힌다고 신모 교사(38·서울H고)는 고백한다.
Y고 장모 교사(43)는 대입원서접수를 한달 여 앞두고 요즘 일요일도 잊은 채 밤잠을 설치며 학급학생들의 성적과 지원대학 자료분석에 골몰하고 있다.
그러나 여느 해와 마찬가지로 학부모와 학생사이에 끼여 또 한차례 치를 홍역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마음이 무겁다.
대부분 학부모들은 자녀들의 성적은 무시한 채 명문대를 고집하고 중·하위권 학생들도 합격과는 거리가 먼 대학을 선택, 억지를 쓰기 일쑤여서 교사·학부모·학생사이에 갈등이 빚어지고 만다.
『상위권은 상위권대로, 또 중·하위권은 그들대로 문제가 있기 때문에 원서 쓸 때에 항상 트러블이 생겨 애를 먹게된다』는 장 교사는 『이래저래 고3 교사는 하루도 마음 편할 날이 없다』고 했다.
여기에다 육성회비·등록금·앨범비·보충수업비 독촉 등 돈 문제까지 채근해야 하므로 그야말로 「죽을 맛」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학생들을 점수벌레로 만들어 수업을 할 때면 「진짜 교육은 이것이 아닌 데 하는 회의가 언뜻언뜻 들 때가 많습니다.』
신모 교사 (42·서울C고)는 『고3 교사나 학생이나 모두 입시굴레에서 벗어나 참교육을 이루기 위해서는 현행 입시제도와 교육환경을 이대로 둘 수 없다』고 강조한다.

<정순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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