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꿈 나의 바둑|고자먹는 재미로 둔 바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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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바둑돌을 처음 잡아본 것은 4세 때였다. 당시 아버지는 목포시내에서 지물포를 경영하셨는데 친구 분들과 자주 바둑을 두셨다. 일제 때 동경유학을 하셨을 만큼 당신의 고향인 전남 영암일대에서는 알아주는 갑부소리를 들으셨으나 6·25를 전후로 몰락한 시름을 바둑돌에 담아 달래셨던 것이다.
희고 검은 돌들을 번갈아 놓아가며 때로는 웃고, 때로는 찡그리고, 때로는 또 장탄 식의 긴 한숨을 토해내며 심각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어른들이 신기했다. 나도 바둑을 두겠다고 아버지를 졸랐다. 4점으로 팍 막히게 둘러싸면 1점을 잡아낼 수 있다는 기본적 사활의 이치를 배운 다음 아버지와 대국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띄엄띄엄 돌을 놓아 가셨는데 나는 촘촘하게 붙여서 두었다. 행마법을 전혀 몰랐으므로 일자로 죽 이어지는 줄바둑이었다.
9급 정도의 기력이셨던 아버지와 이내 맞바둑이 되었고, 아침에 본 신문 기보를 저녁에 복기하는 것을 본 아버지가 나를 데리고 기원으로 가셨다. 노인들의 귀여움을 받으며 기원출입을 했는데 순전히 눈깔사탕이며 비과, 그리고 미루꾸라고 불리던 캐러멜을 얻어먹는 재미로 배운 바둑이었다. 어른들이 바둑을 두자고 할 때마다 과자를 사주지 않으면 안 두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서울로 올라온 것은 5세 때였다. 기재가 있으니 서울로 가 선생을 찾아보라는 기원원장과 주변 어른들의 권유를 아버지가 받아들이셨던 것이다. 1958년 가을이었다.
명동에 있는 송원기원으로 조남철 선생을 찾아갔다. 9점을 놓고 가르침을 받았는데 졌던 것 같다.
다음에는 이학진 선생과 김인 국수, 그리고 고 정창현 사범한테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이학진 선생은 수많은 기서와 고기보들을 갖다주며 초보적인 행마법을 가르쳐 주셨고, 김인 국수한테 특히 많은 가르침을 받았는데, 지도방법이 독특했다. 하루에 한판씩 지도 기를 둬주는데 딱 한 수씩만 가르쳐 주시는 것이었다. 『이 점이 패착이다』『악수다』『능착이다』 칭찬은 한마디도 없고 잘못된 점만 지적하는데 그것도 자세한 설명이 없이 딱 한마디만 해주시는 것이었다.
어린 소견에 왜 자세히, 그리고 친절하게 안 가르쳐주나 해 서운하기도 했다. 스스로 투철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공부함으로써 스스로 깨우치게 하려는 깊은 뜻이었음을 알게된 것은 훨씬 뒤 일본 기원에서 초단을 땄을 때였다.
명동에 있는 한국기원에 원생 격으로 다니며 바둑을 배웠는데 잊혀지지 않는 분이 정창현 사범이다. 정 사범이 원생 사범 격이셨는데 한번 혼이 났던 적이 있다.
지금의 장수영 8단·이동규 7단·유병호 6단 등과 어울러 대국을 했다. 그런 다음 정 사범 앞에서 복기하면서 지도를 받았는데, 나는 장수영과 어울려 바둑은 두지 않고 만화방으로 달려가고는 했던 것이다. 복기 해보라면 복기하는 시늉으로 즉석에서 두는 식이었다. 그런 식으로 대강 넘어가고는 했는데 하루는 정 사범이 따로 복기시키는 바람에 들통이 났고, 우리는 3대씩의 꿀밤을 맞았다.
삼선국민학교에 들어갔으나 아무래도 학교공부 보다는 바둑에 치중하는 생활이었다.
가세는 더욱 기울어 집에서는 단돈 1원도 용돈을 안 주었으나 기원에 가서 어른들과 바둑을 두면 용돈을 얻을 수 있었다. 물론 몇 푼 안 되는 돈이었지만 그 돈으로 만화책도 빌려보고 초장 찍어 먹는 해삼을 길거리에서 사먹곤 했던 기억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떠오른다.
바둑을 두면 만화책도 볼 수 있고, 맛있는 해삼도 사먹을 수 있고, 군것질도 할 수 있으므로 바둑을 두었지 「바둑」에 일생을 던지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아니, 도무지 그런 것들을 생각할만한 나이가 아니었다.
나는 2남4녀 가운데 다섯째다. 목포에서 올라온 후 아버지는 보문동시장에서 야채장사를 하셨다. 우리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절감하고 돈의 무서움을 알게되었으며, 그리고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길은 바둑을 둬 이기는 수밖에 없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를 깨우치게 된 것은 일본유학에서 돌아온 다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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