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석 국사편찬위원장의 연변기행(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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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벅찬 감동과 흥분 속에서 만보산 현지를 방문하고 돌아온 이튿날, 심양사회과학원의 담역·왕향 두 연구원과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여름 휴가 중인데도 일부러시간을 내 만보산까지 동행해준 그들의 노고를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몰라 감사하다는 말만 자꾸 되풀이하는 내게 그들은 내년 초에 개최되는 사회과학원 주최의 학술발표회 때 초청하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돌아갔다. 그들을 전송하고 난 뒤 일행은 곧바로 영신농장을 향해 출발하였다.
행정구역상 영신농장은 괴뢰만주국 당시에는 길림성 영길현 화가촌이었으나 현재는 길림성 영길현 만창향 영신촌 삼대대로 되어 있다. 장춘에서 길림을 향해 약 80리정도 가다보면 영신농장이 보이는데 만보산으로 가는 길과는 달리 영신농장으로 향하는 국도는 길이 좋아서 별다른 고생은 없었다.
내가 이규동·이종대 일가의 영신농장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24,25년 전의 일로서 1985년 이종대선생이 돌아가실 때까지 수십 차례 그와 대담한 일이 있었고 또한 그로부터 많은 관계사료를 기증 받아 여기에 대한 논문을 쓴 일도 있었으므로 영신농장의 답사 또한 이번 중국여행의 중요한 목적가운데 하나였다.

<서간도서 첫 터전>
만주지역에서의 독립운동이 재만 한인사회의 인적·물적 지원 하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고 영신농장 역시 그러한 독립운동에 절대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곳이므로 당시 재만 한인사회의 실상과 독립운동과의 연관관계를 살펴보기 위해서 영신농장의 방문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참고삼아 영신농장의 설립경위를 간단히 설명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영신농장은 1935년 이규동·이종대일가가 설립한 농장인데 이들이 영신농장에 앞서 세웠던 신안촌농장과 삼·일 농장과 더불어 독립운동단체의 주요한 회의가 개최되기도 했고, 또한 독립운동의 경제적 지원을 담당하기도 했던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1910년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은 남부여대하여 중국동북지역인 만주로 경제적 이민이나 혹은 정치적 망명을 하게 되었는데 이규동·이종대 일가도 그 대표적 예의 하나였다.
그들 일가는 원래 강원도울진군 평해면에서 살았으나 1911년부터 1913년까지 3차에 걸쳐 일가 모두가 서간도로 이주해 만주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가꾸어 갔으며 그런 가운데서도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에 들어서야 겨우 기반이 닦여 신안촌농장을 만들게 되었고 여기에 길흥학교를 세워 민족교육도 병행해 나가는 등 완전히 자리를 잡는 듯 하였으나 하늘이 돌보지 않았음인지 수해로 인해 신안촌농장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하는 시련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신안촌농장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옮겨가 삼·일 농장과 계림학교를 세웠으나 그 후 만주사변이 발발하면서 이규동·이종대일가는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때 이규동은 북경과 남경등지로 피신하여 활동하다가 1935년에 귀만, 종전의 경험을 되살려 영길현 화가촌에서 또다시 시작한 것이 바로 영신농장이었다.
영신농장이 어느 정도 기틀이 잡혀가자 여기에도 영신국민학교와 영신농업학교가 설립되었고 먼 지방에 사는 한국인의 자제들까지 유학을 와 민족의식이 투철한 교사들에 의해 철저한 민족교육을 받게 되었다.

<초가마을도 보여>
이 같은 영신농장에서의 민족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의 인적자원이 제공되었던 것이다.
영신농장은 또한 오갈 데 없는 재만 한농들을 받아들여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고 앞서의 신안촌농장, 삼·일농장 때와 마찬가지로 독립운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주기도 하였다. 독립운동의 배경이 되는 재만 한인사회의 실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독립운동 그 자체의 성격을 정확히 인식할 수 없다.
그래서 요즘은 국내에서도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실정인데 내가 영신농장에 꼭 가보고 싶어했던 것도 바로 그러한 맥락에서 연유된 것이었다.
영신농장으로 가는 길 안내는 홍종신씨가 맡아 주었다. 그는 원래 고향이 경상남도라 했다. 어릴 때 만주에 와 현재는 장춘시에 살고 있으며 스스로를 자동차 정비 기술자라고 소개했다. 그는 길림성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고 우리 일행에게도 매우 호의적이었다.
차창 밖으로 내다본 영신농장으로 가는 길옆의 풍경은 만보산으로 갈 때와 마찬가지로 끝없이 펼쳐지는 대평원이었다. 곳곳에 조그마한 초가마을이 보이기도 했는데 그 드넓은 평원에 대풍이 들어 벼가 고개를 숙이며 누렇게 익어 가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서너 시간 가까이 달렸을까. 아무래도 여기인 것 같다며 홍종신씨가 차를 멈추게 하더니 길을 가고 있는 한 아낙네를 불러 영신농장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또렷한 한국말로 여기가 바로 영신대대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문화혁명 때 행정구역을 대대니, 소대니 하는 군대식으로 개칭했던 것을 아직 그대로 쓰고 있는 듯했다. 설명을 들으니 4개의 사(소대) 가 모여서 대대가 되고,4개의 대대가 모여서 향이 된다는 것이었다.
다 온 것 같다는 홍씨의 말에 차에서 내리니 길을 가리켜 주였던 아낙네와 또 한사람의 부인이 길가 바로 옆이 자기들 집이라며 데리고 갔다.그들은 한국에서 왔느냐고 하지 않고「남조선」에서 왔느냐고 물었는데 항상 한국은 남조선, 북한은 북조선이라 부르고 있는 것 같았다. 또 모두들 상하 없이「동무」라고 통칭하고 있어 과연 사회주의국가에 왔구나 하는 실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재 중국동포들의 생활형편을 살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은 나는 재빨리 집안 내부를 살펴보았다. 그들의 가옥과 살림살이들은 너무나 간단하고 주위환경도 전혀 정돈돼있지 않아 언뜻 보기에도 사는 형편이 몹시 어려운 듯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얼굴 표정에서 나타나는 순박함이나 밝음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었다.

<가난에 찌든 모습>
인사를 하고 난 후 주인은 어디 가셨느냐고 물으니 마침 오늘 영신대대에서 회의를 하고있다며 앞장서서 안내해 주었다. 회의장소를 찾아가는 동안 둘러본 마을은 마치 어릴 때 살던 고향마을에라도 온 것 같이 푸근한 마음이 들게 하는 풍경이었으나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50∼60년 전의 내 고향 시골마을보다도 더 낙후되고 가난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신대대의 회의라고 하기에 많은 사람들이 공화당 같은 넓은 장소에 모여 회의를 하는구나 하고 내 나름대로 짐작하였으나 10분도 채 되지 않아 도착한 곳은 어느 집의 안방이었다. 그곳에 모여있는 사람들은 10명 내외였는데 회의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뜻밖에도 노름을 하고 있었다.
우리와 체제가 다른 사화주의 국가인 만큼 그곳 사람들은 회의 중에는 일체 딴 짓을 못하고 그저 열심히 토론만 하고 있겠거니 했던 나의 상상이 여지없이 무너지면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생각지도 않던 소위「남조선」사람이 나타났다고 하여 그들도 무척 놀란 모양이었다. 올라오라고 붙잡는 그들에게 이끌려 방으로 들어간 후 우선수인사를 나누고 우리 일행이 찾아간 목적을 말하였다.
그들은 내가 누구라는 것과 찾아온 목적이 무엇인지를 들은 후에야 일단 안심이 된 듯 여러 가지 얘기를 해주었다. 그러나 기대 밖으로 괴뢰만주국 치하에서 이규동이 경영했던 당시의 영신농장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들려준 바에 의하면 우리 일행이 찾아간 그 마을은 영길현 만창향 선광촌(괴뢰 만주국치하 영신농장의 한 마을임)이란 곳이었는데 현재 총1백45호에 7백5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이 경작하고 있는 토지면적은 1백76상이라는 것이었다. 그들이 처음 이곳으로 이주해 온 것은1975년부터이며 그 후 오늘과 같은 마을을 이루었다는 것인데 아마도 그래서 영신농장에 대해 아는 이가 없는 것 같았다.
다만 이들과의 대담 중에서 얻어들은 사실은 당시의 마을은 그대로 있되 중국인 마을이 되었다는 것. 영신대대에는 주로 경상도 사람이 많다는 것. 영신은 원래 선광 이었는데 일제침략 때 영신이라 했던 것을 다시 선광으로 되 바꾸었다는 것 등이었다.

<경상도사람 많아>
현재 영신대대의 농토는 각자 분배하여 농사를 짓고 규정에 의해 생산물을 국가에 바치고 있다 하며 1년에 3,4개월만 농사일을 하면 편안히 살수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만주는 추울 때는 섭씨 영하25도에서 40도, 더울 때는 화씨1백도까지 올라가 이때는 일을 할수 없고 곡식이 자라는 기간이 나머지 3, 4개월에 불과하기 때문에 1년 내내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마침 거기 모여있던 사람들 가운데 약 한달 전에 한국을 방문했었다는 최종노 노인이 있었다. 그는 한국에 다녀온 후 마을사람들에게 한국의 발전상에 대해 어찌나 침이 마르도록 얘기했었던지 방안에 모여있던 모든 사람들이 우리 일행에게 자기들도 한번 한국에가 보았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부탁을 해오기도 하였다.
그런 것을 보자니 역시 한민족은 하나의 핏줄이라는 끈끈한 정감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들이 소원하는 대로 한국에 꼭 한번 와 볼 수 있게 되기를 진정으로 기원하면서 그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도 석양을 받은 대평원은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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