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재민은 기다리고 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어느 사회에나 재난은 수시로 일어나게 마련이고 일단 재난이 일어났을 때는 정부 해당 행정기능과 사회의 박애정신은 이재민의 재해를 신속히 복구하는데 집중되어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시기를 놓친 구호조치는 그야말로 사후 약방문격이 될 수도 있고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게 되는 비경제성을 빚게 된다.
그런데 우리는 어제 중앙일보 1면에 보도된 「15단계 거치는 수해복구비」 기사가 시사하는 행정기관의 비능률적 조치에 개탄을 금치 못한다.
지난 달 남부지방을 강타한 폭우 피해는 자연재해에 대한 우리의 대비가 얼마나 허술한가를 재확인해 주었고 정부는 장기적 계획을 세워 대규모 투자로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겠다고 발표했다.
우리는 그같은 대규모 투자사업의 계획에 앞서 긴급사태에 대처하는 행정체계의 정비와 풍토개혁이 앞서야만 재난으로부터 우리 사회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된다.
남부지방에 물난리가 난 것은 지난달 22일부터 26일 사이다. 비가 그치면서 복구가 시작돼 이달초까지는 대부분 지역에서 응급복구가 모두 끝났다. 그런데도 정작 무너진 집을 새로 짓는 등 항구복구 사업은 한달이 지나도록 손도 못대고 있다. 집을 잃은 주민들은 학교 강당이나 천막의 임시거처에서 불안한 생활을 하며 불평과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는 소식이다.
과연 이럴 수밖에 없는 일일까. 우리는 이같은 사태가 행정체계의 비능율과 함께 일선행정의 무사안일에서 빚어진 제도적 부조리라 본다.
현행 제도상 수해복구는 피해 주민들의 읍·면·동에 대한 신고로부터 시작된다. 이를 시·군에서 종합하고 다시 시·도가 종합집계, 중앙재해대책 본부에 보고한다.
이를 토대로 중앙재해대책 본부는 현장 합동조사를 실시해 피해를 확정하고 이에 따라 복구계획안을 세운다. 계획안은 16개 정부부처 국장급으로 구성된 재해대책 본부회의를 거쳐 국무회의에 상정되고 이를 통과하면 각 소관부처에 통보된다.
각 부처는 소관분야의 복구비 예산 요구안을 작성해 요구안이 기획원을 거쳐 다시 국무회의를 통과해야만 예산이 지방자치 단체로 영달되고 복구사업에 착수할 수 있게 된다. 세분하면 15단계가 된다.
이같은 절차에 따라 재해대책 본부는 8월 12일까지 현장확인 조사를 마쳤고 복구소요 예산을 4천2백억 원으로 잠정 책정해 놓고 있다. 그러나 각 부처간 조정을 거쳐 복구계획안이 수립되자면 앞으로도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른다.
이런 체계로야 어떻게 사회의 긴급한 행정수요에 대처할 수 있겠는가. 너무도 날카로운 「번문욕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이 복구지연의 까닭은 아니다. 지방자치 단체의 경우 긴급시 일정범위 안에서 예산을 미리 집행하고 사후정산을 하는 제도가 마련되어 있다.
그런데도 대개의 경우 사후정산에 따르는 절취상의 복잡함이나 혹시나 있을지도 모르는 책임을 피해 일선 시·군 등지에서는 확정예산이 배정된 뒤에야 착수하는 것이 관행이 되어 왔다. 현재의 행정체계와 행정풍토에선 긴급한 사태에 지각대응이 되풀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재난에 대한 대비는 항구적 과제인만큼 지금이라도 비능율적인 행정체계와 무사안일의 풍토는 시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정부의 신속한 조치를 기대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