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맛』 삶에 대한 방식 담백하게 표현 『권 태』 진부한 도덕주의 전통에 일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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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비평은 암호를 숨기고 있는 문학작품 또는 빙산처럼 표면 구조의 밑에 숨김의 구조를 거느리는 문학작품과 만났을 때 아연 활기를 띤다.
스스로 자신을 다 밝혀버리는 문학작품은 비평을 소강상태에 빠뜨린다. 박경수씨의 「시골맛(현대문학·8)」과 이청인씨의 「키작은 자유인(문학사상·8)」이 그런 부류의 소설들이다.
이 소설들이 독자와 소통하는데 비평의 중재는 거의 필요없는 것처럼 보인다. 위의 작품들이 자명한 소설적 구조라는 지적은 그러나 비평적 평하는 아니다. 가령 「키작은 자유인」은 이씨가 「…가위밑 그림의 음화와 양화」라는 동일한 부제목으로 지난달에 발표한 「잃어버린 절」의 결함을 훌륭하게 극복하고 있다. 서술의 속도가 너무나도 정체돼 있는 나머지 이씨의 지난달 소설은 읽어가다가 문득 충동-목이라도 매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히게 했었다.
그러나 그처럼 가혹하게 인내심을 시험받지 않고도 「키작은 자유인」은 읽혀졌다. 박경수씨가 「시골 맛」에서 보여주는 삶의 성찰 방식도 담백하지만 씨다운 것이다. 「시골 맛」은 박씨가 아주 오랜만에 써낸 소설 같은데 안정되어 있고 무르익어 있는 씨의 문체는 여전해서 독자는 아무런 불안감의 부담없이 작품을 읽을 수 있다.
이들 소설의 강점과 미덕은 가령 이유범씨의「안개와 섬(문학정신·8)」과 비교해서 읽게 될 때 좀 더 선명하게 부각된다. 이유범씨는 야심을 가지고 우리가 겪었거나 겪고있는 가공스러운 정치현실을 은유하고 있지만, 작가가 구사하는 비유와 상징들이 치밀성과 구체성으로 현실과 맞물리지 못함으로써 소설의 구조 자체가 공소해지고 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마광수씨가『문학사상』에 연재하고 있는 「권태」도 잠시 화제삼아보고자 하지만, 이 일은 몇 가지 이유로 해서 부적절하다고 생각될지 모르겠다. 우선 연재가 진행중인 작품을 문제삼는 것은 비평의 관례가 아닌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근래 이 소설의 작가가 대중적 화제를 생산하는 일에 부심하고 있는 듯한 인상도 비평을 대중적 화제의 차원에 함몰시킬 우러를 야기한다.
그러나 관례란 깨어져도 좋은 것이고 대중적화제의 그늘에 문학작품의 간과할 수 없는 면모가 묻혀지는 일이 방치되어서도 안된다. 「권태」는 시인이며 대학교수라는 신분에 비추어서는 매우 파격적인 작중인물의거의 몰염치스럽다할만치 외잡스런 일상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 다루어지고 있는 경험 자체는 분명 몰염치스럽고 외잡스런것이지만 그러나 「권태」는 몰염치스럽고 외잡스런 문학적 현상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의 본격소설이 고수해온 어떤 전통-스토이시즘이랄까 도덕주의의 전통에「권대」는 충격을 가하고 있지만, 그 같은 전통이야말로 한국소설의 정체와 답보의 한가지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허심탄회하게 인정해야 될 것이다. 고착된 도덕주의는 도덕이 가장 나쁘게 자리잡은 모습일는지 모른다. 문학적 사고에서도 예의는 아니다.
문학에 준엄하고 경건한 온갖 역할, 심지어 혁명가와 사제의 역할까지를 요구하는 완강한 이데올로기에 권위적으로 지배되고 있는 우리의 근래 문학풍토는 자칫 문학적 상상력의 활기있는 실천을 위축시킬 위험을 내포한다. 온갖 박해와 고난을 무릅쓰면서 우리시대의 문학적 신념은 의심할 바 없이 정당성을 가지는 도덕적 이념을 확립해냈다.
그러나 이 이념이「권태」와 같이 외잡스럽지만 대담하고 용기있는 문학적 현상을 그것이 퇴폐하고 반동적인 부르좌적 상상력의 소산이라는 이유로 박해하는 또 다른 권위가 되어서는 안되리라 믿는다.
한룡환

<소설가·동국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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