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 자율화에 진일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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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정부 부처와 공공기관의 기구나 기능을 손질할 때는 오로지 국리민복에 대한 봉사효과의 극대화를 그 으뜸원리로 삼아야 한다. 이와는 정반대로 관련부처간의 힘 겨루기가 그 원리를 짓밟아 버리는 사례들을 우리는 종종 목격해왔다.
재무부가 21일 청와대에 보고한 한은법 개정안의 주요내용 역시 시대적·국가적 요청에 부응하는 중앙은행 위상정립의 원칙보다는 재무부와 한은 간의 치열했을 줄다리기를 더욱 실감 있게 느끼게 한다. 두 기관이 합의하여 마련한 것으로 보도된 법 개정안의 내용을 보면 금융통화위원회 의장직을 재무부가 양보한 대신 금융기관 신설 인가권은 재무부가 행사토록 돼있다.
보다 중요하고 민감한 쟁점들인 한은총재 임명절차, 금통위에 대한재무장관의 감독업무 지시권, 그리고 주요 통화신용정책에 관한 재무부와 금통위의 협의절차에 대해서는 두 기관의 입장이 마지막까지 팽팽하게 맞서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법 개정안은 이제 일단락 짓기는 했으나 통화신용정책의 결정권행사와 규제권한의 귀속문제에 대해 개운치 않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은행감독의 주요기능인 인가권·규제권·통제권, 그리고 제재권 중 가장 중요한 권한인 인가권을 재무부가 회수해가고 통화신용 운영관리의 최고정책결정기관인 금통위의장을 한은총재가 맡기로 한 것을 비롯해 각종 기능의 분할은 꽤 그럴싸한 권한의 안배로 보일 수는 있어도 이러한 나눠 갖기를 합리화시킬 정신이나 원칙을 찾기는 어렵다는데 문제가 있다.
중앙은행의 중립성 회복을 둘러싸고 최근 2년간 논란이 분분했지만 적어도 60년대 이래의 관치금융·지시금융 퇴치를 위한 금융자율화와 그 실천의 초석이 될 한은의 독자성 확보라는 대 원칙에 대해서만은 대체로 의견일치를 보여준 것이 사실이다. 실물경제의 발전에 걸맞지 않게 낙후되어있는 금융산업을 발전시켜 자원배분의 정상화와 경제성장 촉진이라는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기도 하다.
중앙은행의 지위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가 총재임명절차와 총재의 인사권행사에 있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62년의 한은법 개정과 그 이후 다섯 번에 걸친 법개정은 중앙은행의 인사권 행사에 결정적인 통제를 가했고 이것은 곧 통화 및 신용조정에 관한 정부의 권한행사로 직결되었다.
이번 개정안 작업의 총재임명 절차대목에서도 재무부는 재무장관제청을 고집한데 반해 한은은 대통령이 바로 임명할 것을 요구해 팽팽한 의견대립을 보였다. 못마땅한 한은총재를 바꾸는 과정에 재무부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상황이라면 한은의 독립성 보장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총재임명절차에 관해 한은 측의 입장이 수용된 것은 이런 뜻에서 바람직한 결정이었다.
이제 법 개정안은 국회의 심의를 남겨두고 있다.
이 법안을 최종적으로 다듬는 국회는 아무쪼록 우리 경제의 실상에 맞는 중앙은행기능을 모처럼 확립한다는 사명감을 바탕으로 그 동안의 줄다리기에서 빚어진 군더더기와 불합리를 말끔히 걸러주기 바란다. 국회를 통과한 법안의 내용은 객관적인 원칙에 입각해 있음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국회가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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