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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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너는 생명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다.』 생텍쥐페리의 소설 『인간의 대지』에 나오는 「너」는 물을 두고 한 말이다. 생텍쥐페리는 『네 은혜로 우리 안에 말라 붙었던 마음의 모든 샘들이 다시 솟아난다』고도 했다.
우리의 시인 이상은 목이 마를 때면 「석영질 광석 내음새」가 나는 물을 마셨다. 그런 물이 폐부에 들어갈 때면 「백지에 싸늘한 선을 긋는 것 같다」는 감성적인 표현도 곁들였다.
그러나 지금 우리 주위에 「너」와 같은 「석영질 광석 내음새」가 나는 물을 어디에서 찾아 마실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산수 좋다는 심산유곡을 가봐도 벌써 비닐 쓰레기가 여기저기 틀어박혀 있고, 한쪽에서는 샴푸를 풀어 머리를 감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요즘 보사부와 건설 기술 연구원이 전국 상수도 수질 검사를 한 결과를 보면 수도물이 무슨 독극물이나 되는 것 같다. 식수 수질 기준에 맞는 물은 어디에도 없었다. 서울 영등포와 노량진 정수장의 경우 암모니아성 질소가 식수 기준치를 최고 10배나 넘고 있었다.
말이 좋아 「암모니아성 질소」지, 그 말 뒤엔 화장실에서 흘러나온 분뇨가 강물로 들어가 제대로 정화되지 못한 채 우리의 수도꼭지로 되돌아온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그 뿐이 아니다. 철, 망간, 카드뮴 등 중금속 물질도 예외 없이 검출되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장균과 일반 세균도 빠지지 않았다.
물이 더러우면 모든 것이 더럽다. 밭에서 나는 채소에서부터 우리 밥솥의 밥에 이르기까지 물이 닿지 않는 것이 없다. 흙탕물은 가라앉히기라도 하지만 중금속 물질이나 다른 화학물질은 씻을 수도, 쉽게 걸러 낼 수도 없다. 정수장에서 아무리 중화제를 퍼붓고 걸러내도 한계가 있다.
우리도 이제는 깨끗한 물을 사먹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그나마 믿을만한 물이 어디 있으며, 그보다도 반만년을 두고 노래처럼 불러온 금수강산에 깨끗한 물 한 모금 없다는 생각은 새삼 우리 목을 마르게 한다.
국민 소득 5천 달러를 구가한다지만 수도꼭지에서 쏟아지는 물도 마음놓고 못 마신다면 그 보람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정치인들은 공연히 구름 잡는 요설로 국민을 현혹하기보다는 마실 물이라도 깨끗하게 하는 약속을 내걸고 실천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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