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인·조사 받던 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구인 현장
○…김대중 총재에 대한 강제 구인이 집행된 2일 아침 평민당사는 울분과 침통함이 교차하는 가운데 『김대중』연호와 구호·함성 심지어 울음소리까지 섞여 뒤범벅.
전날 당사 총재실에서 잠을 잔 김 총재는 오전6시에 기상한 뒤 당직자·의원들과 만난 데 이어 총재실 옆 농성장으로 들어가 구인 당하는 심경의 일단을 털어놓고 동요하지 말도록 당부.
김 총재가 농성장에 들어오자 3백여 당원들은 박수와 함께 『김대중』을 외쳤으며 일부 여성당원들은 「엉엉」 소리내어 울었다.
김 총재는 『뚜렷한 이유 없이 강제 구인되는 사실이 우리가 처한 민주주의의 험난한 현실을 말해주는 것』 이라며 『이번만큼은 민주주의가 될 줄 알았는데 또다시 이런 사태가 벌어졌다고 비감한 표정으로 연설을 시작.
김 총재는 『독재자는 전투엔 이겼으나 전쟁에 졌다』며 『전두환·박정희가 졌고 이번엔 노태우가 질 것이다』고 하자 『옳소』하며 박수.
○…오전7시 정각에 여의도백화점6층 당사로 찾아온 안기부 수사요원 6명은 박상천 의원의 안내로 총재실로 들어서는 순간 한영애 지구당위원장 등이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여기서 끌어내라』고 소리쳐 옆 사무총장실에서 잠시 대기.
수사요원들이 이재근 총장에게 구인장을 제시하자 이를 검토한 이 총장은 『문동환 의원의 구인장에 장소표시가 돼있지 않지만 김 총재와 같이 가기 때문에 양해하겠다』고 한 뒤 『김 총재가 자신의 승용차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구.
오전7시15분쯤 총재실로 들어간 수사요원들은 김 총재와 문 의원에게 구인장을 제시했고 잠시 훑어본 김 총재는 담담한 목소리로 『갑시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때부터 당원들은 『안기부를 박살내자』 『안기부를 해체하라』는 구호와 『투사의 노래』『5月의 노래』 등을 불렀으며 여성당원들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총재님』을 큰소리로 부르기도 했다.
연행 조사
○…안기부 수사관들과 함께 오전7시20분쯤 당사인 여의도백화점 6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에 내려온 김대중 총재는 백화점 정문에서 곧 변호인으로 지명된 박상천 의원 및 안기부 수사관 1명과 함께 서울1루6099 총재 승용차에 탑승했으나 정문 앞에서 『안기부를 해체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농성을 벌이던 3백여 명의 당원들에게 둘러싸여 10여분간 꼼짝도 못했다.
일부 당원들은 눈물을 홀리면서 길바닥에 드러눕는 바람에 차량행렬은 1백50여m 떨어진 주택은행 본점 앞 4거리까지 진행하는데 30분간이나 걸려 시간이 지체되자 김 총재가 차에서 내려 당원들과 함께 원효대교 입구까지 걸어가 1시간만에 도착.
이날 김 총재와 동시에 구인 된 문 의원은 안기부수사관 1명, 이상수 대변인과 함께 서울3구9229 자신의 승용차에 탑승해 줄곧 김 총재 승용차 뒤를 따랐는데 김원기·정대철·이철용 의원 등 20여명의 평민당 의원들의 차량이 행렬을 이루어 오전8시4O분쯤 조사장소인 중부경찰서에 도착.
김 총재는 이재근 사무총장·한광옥 비서실장·박상천 의원 등과 함께 곧바로 조사실인 3층 대공3계로 올라갔으나 뒤따르던 정대철 의원은 경찰4∼5명이 허리춤과 팔을 잡으며 못 올라가게 하자 고함을 치며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김 총재와 문 의원은 도착즉시 조사실 안 3층 대공3계와 외사계 사무실로 각각 들어가 조사에 응했다.
이들 사무실이 있는 3층 복도에는 전날 밤부터 30여명의 안기부직원들이 나와 사무실을 점검한데 이어 출입문 앞에 각각책상 2개씩을 놓고 자체 경비를 벌였으며 경찰서 건물1·2·3층 계단과 복도에는 정복차림의 경찰 1백여 명이 외부와의 출입을 완전 차단한 채 삼엄한 경비를 폈다.
한편 경찰서 밖 도로에는 이른 아침부터 모인 평민당원 20여명이 몰려와 『안기부해체』 등 구호를 간간이 외치기도 했으나 『평화적으로 하자는 게 총재의 뜻』이라고 말리는 간부들에 의해 곧 자제하는 모습.
○…이날 안기부조사는 서 의원 밀입북의 사전인지 여부인 듯.
안기부는 김대중 총재에게 조사할 내용을 이미 구인장에서 대강 밝혀왔다.
구인장에는▲서경원 의원 공천에 김 총재의 개입 가능성▲문익환 목사· 임수경양 입북과의 관련성▲서 의원 입북시 사전인지·여비지원 여부▲서 의원을 유럽방문에 수행시킨 이유 등이 의문으로 제시돼 있다.
그러나 안기부 측이 준비하고있는 의문점은 훨씬 많아 2백60여 가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어떤 「비장의 카드」가 나올지 관심거리다.
여권에서는 『단순한 의문만을 갖고 구인 했겠느냐』고 주장.
공안당국이 제기하는 김 총재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의문은 서 의원 밀입북의 사전 인지인데 안기부 측은 그 근거로 서 의원이 지난해 8욀 입북을 위해 미국을 경유하며『당 지도부(김대중 총재)의 소개로 민족학교에 간다』고 한 발언과 방제명원일 레벨회장이 『총재에게도 보고했다는 말을 들었다』는 진술 등을 제시하고 있다.
공안당국은 따라서 입북 전 혹은 최소한 지난 2월께는 알았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 외부자금이 평민당에 흘러들었을 가능성도 조사대상인 듯하다.
민정당의 한 고위당직자도『공천과정에서 서 의원이 돈을 헌납했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금품수수는 지난 총선에서 공천경합 때 5천만 원이 오갔다는 설과 유럽 여행시 서 의원이 2천만 원의 여행경비를 냈다는 설 등 두 가지다.
김 총재는 반박자료에서 이미 이 부분에 대해 사실이 아닌 것으로 해명했다.
또 「친서설」로 한 때 파문을 일으켰던 김 총재의 대북 메시지 전달 및 서 의원에 대한 입북 여비 지원 설도 조사의 초점이 될 전망이다.
평민당 측은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서 의원이 어떤 진술을 해놓았을 지가 가장 걱정』 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2백60여 가지의 질문공세에 김 총재가 일관된 답변을 할 수 있을지, 서 의원의 진술과 일치할 수 있을지가 관심.
김 총재의 진술이 서 의원 진술과 일치되지 못할 경우엔 이번 구인조사가 끝나도 김 총재에 대한 고리로 남을 수도 있다는 것.
평민당 측은 변호사 출신인 박상천 의원을 동행시켰는데 안기부 측은 1일 밤 『다른 사무실에서 대기하며 수시로 자문을 해도 좋다』고 허용을 통보했다.
구인 통보
○…농성 8일째인 평민당은1일 오후 안기부로부터 김 총재에 대한 구인장 집행일시와 장소가 통보되면서 술렁거림과 긴장 속에서 집행 전야를 보냈다.
구인집행이 카운트 다운되기 시작했다는 신호가 안기부 측으로부터 온 것은 오후5시쯤. 창구를 맡고있는 박상천 의원에게 『내일이나 모레쯤 아침시간에 조사할 것』 이라는 연락이 오면서 당사는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10시30분 안기부당국자로부터 구체적 내용이 전달.
이에 비상대기체제로 들어가 야간 농성조에서 빠진 당직자와 의원들에게 다음날 오전 6시30분까지 당사로 집결하라는 지시가 내려지는 한편, 농성당원들에게 구인 순간의 행동지침을 설명.
김 총재는 농림수산위·건설위 소속의원들과 저녁을 같이 하면서 수해복구를 위해 대책마련을 지시한 뒤 오후 9시쯤 당사에 나와 김원기 전 총무·박상천·조승형 의원 등 대여창구역들과 한광옥 비서실장·권노갑 의원 등과 대책을 숙의하고 농성자들을 격려.
김 총재는 이날 자정을 넘긴 직후 총재실내에 마련된 야전침대에서 취침.
○…평민당은 김 총재의 구인집행에 의연하면서도 당당하게 응했음을 부각시키는 데 신경.
집행통보를 받은 박 의원은 『사실 안기부 쪽에서 구인장 집행형식이 아닌 충분한 예우를 갖춘 형식을 제시해 보자는 얘기가 있었으나 이를 거절했다』면서 『굳이 구인장 집행형식을 고집한 것은 철저히 수사를 해 적당히 해줬다는 얘기가 안나오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
지난달 27일 구인장 발부 후 평민당과 안기부간에는 막후 절충이 벌어져 평민당측이 안기부가 해명하면 안기부 대신 검찰조사는 받겠다고 했으나 안기부 측이 거부했고 안기부 측의 제3의 장소 자진 출석 제안은 평민당 측이 거절, 협상에 실패해 강제구인에 이른 것.
또 조사장소를 놓고 구인장에는 중부경찰서로 되어있으나 김 총재에 대한 예우 등을 고려, 제3의 장소에서 조사할 것을 제의, 검토가 있었으나 안기부 안가는 평민당 측이 거절했고 호텔은 보안문제로 안기부 측이 난색을 표해 불필요한 오해나「뒷 얘기」의 소지를 막기 위해 구인장대로 중부경찰서로 낙착. <이규진·김석현·안성규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