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윤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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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굳이 상업주의를 앞세운 출판물이 아니더라도 어떤 책이든 일단 정가가 매겨져 서점에 진열되면 그것은 꼼짝없는 상품이다.『책 속에 길이 있다』느니 『하루라도 책을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느니 제 아무리 책의 가치나 효용성을 강조한들 그것은 상품으로서의 책이 돈과 등가교환되어 독자의 손에 들어간 뒤의 얘기다.
그러나 책은 상품이되 여느상품과는 달리 여러가지 법적·사회적 특전을 누리는 특수성을 지닌다. 가령 책은 약품이나 과자·통조림 따위에 의무적으로 표시하게 돼있는「유효기간」이 없다.
책은 소비재적 성격이 강하면서도 독특한 자생력이 있어서 서점에 진열되어있는 동안은 각기 독자적인 생존권을 누린다.
그러다가 불행히 임자를 못만나면 시장에서 도태되어 끝내는 폐지로 전락하고 말지만 일단 장서가의 서가나 도서관 서고에 꽂히면 영구적인 생명력을 얻게 된다.
그뿐아니다. 낱낱의 제품마다 생산자(발행인)의 이름이 일일이 명기되는것도 책만이 향유하는 특전이라 할만하다. 그것은 제품에 대한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함과 아울러 그에 따른 모든 영예도 생산자에게 귀속됨을 뜻한다.
게다가 책은「소비자권장가격」이 아니라「정가」(공정거래법에 의한 재판매가격)가 표시되고 전국 어디에서든 정가대로만 유통되는 유일한 상품이기도 하다. 따라서 할인판매가 용납되지 않는다.
이렇듯 책이 여느 상품과는 다른 특전을 누리는 이유는 그것이 이른바 지적인 문화상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로 그런 특수성 때문에 책은 그 자체로서 더욱엄격한 윤리성이 요구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경우 책을 만들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책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윤리성을 확보하는데 너무도 소홀한 경향이고, 따라서 완성도가 낮은 책들이 수두룩하게 눈에 띈다.
그중에도 가장 심한 것이 번역서에 원전(텍스트)이 밝혀져 있지 않은 경우다. 게다가 역자의 해설이나 후기조차 없어 그 책과 저자에 대한 정보를 전혀 알 수없게 되어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다음이 발행일자 문제. 여러해 전에 나왔던 책을 다시 찍어내면서 초판으로 위장하거나 초판일자를 밝히지 않은 채 중판표시만 하는 경우다.
인명사전의 경우 20여년전에 초판이 발행되고 그후 중판을 거듭해오고 있으나 중판일자만 밝혔을뿐「머리말」이 나「간행사」의 날짜부분을 삭제해버려 언제 초간된 책인지 짐작조차 할수 없게 되어 있다.
같은 저자, 같은 내용의책이 발행처가 바꿜 때마다 제목을 달리해 나오는 것도 문제다.
이 경우는 출판사만이 아니라 저자의 도덕성을 의심케한다.
이런 예는 일일이 열거할 수조차 없을 정도인데, 최근들어 출판사수가 엄청나게 늘어나면서 더욱 심해지는 경향이다.
출판은 권력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있어도 독자의 눈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다. 지적 상품으로서의 특전을 누리기에 합당한 최소한의 도덕성을 확보하는것이 곧 독자에 대한 의무이며 책의 문화를 높이는 길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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