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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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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조선 초 명신 어효첨은 풍속을 바로잡고 기강을 세우는 데 추상같은 관리였다. 믿음을 실천하는 데 한 치의 틈도 없었다. 집현전 교리로 있을 때 풍수상 북쪽 길을 막고 성 안에 산을 쌓으며 개천을 맑게 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다. 풍수설을 믿지 않던 그는 장문의 상소를 올린다.

"무릇 운수의 길고 짧음과 국가의 화복은 다 천명과 인심에 달린 것이고 실로 지리는 관계가 없는 것입니다. (…) 천명으로 주맥(主脈)을 삼고 민심으로 안대(案對)를 삼아서 하늘의 밝은 명령을 돌아보시고 백성의 험악한 반응을 두려워하소서."

세종이 보아하니 그 논리가 정연하고 명백했다. 임금은 정인지를 불러 물었다.

"효첨의 이론이 그럴 듯하오. 그러나 제 부모의 장사에도 풍수를 무시했는지 의심스럽소."

"그렇사옵니다. 일찍이 효첨이 제 아비를 집 옆에 장사지낸 걸 보았사온데 풍수와 무관하게 묘를 써놓았나이다."

"장하도다! 효첨이 참선비로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자식들은 유지를 받들어 광나루 가에 장사지냈다. 이런 그의 소신과 원칙은 조선 초기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밑거름이 됐다.

개화기 정치가 윤치호는 어학의 천재였다. 영어를 배운 지 4개월 만에 주한미국공사의 통역을 맡아 국사를 치러냈다. 미국에 유학 가서는 영어로 일기를 썼는데 "내 생각을 표현할 만한 어휘가 한국어에는 아직도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기독교까지 받아들여 미국 주류사회에 편입되고자 했던 윤치호는 그러나 미국 사회의 배타성에 절망하고 만다. 미국인보다 더 미국화하려던 그의 소신은 이제 일본을 향한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인종 편견과 차별이 극심한 미국, 지독한 냄새가 나는 중국, 그리고 악마 같은 정부가 있는 조선이 아니라 동양의 낙원이자 세계의 정원인 축복받은 일본에서 살고 싶다."

일본의 식민지배가 조선을 문명화하고 서양의 침략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라 믿은 그의 소신은 결국 그를 내선일체(內鮮一體)까지 부르짖다 광복 후 자결하는 처지로 몰고갔다.

지식인의 소신은 존재를 바로 세우는 데 약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바람의 방향에 따라 흔들리는 소신은 그 뿌리를 흔들 만큼 치명적이다. 분야를 바꿔 부총리를 두 번 지낸 인물이 그때마다 새로운 소신을 펴 헷갈리게 하고 있다. "소신이 없다는 것은 깊이가 없다는 것"이라는 게 루마니아 출신 작가 에밀 시오랑의 말이지만 얕게 심어진 백년지계의 나무는 뿌리째 썩어가고 있다.

이훈범 week&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