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 삽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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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표를 사고 팝니다』다른 나라도 아니고 바로 영국에 이런 회사가 있었다. 간판도 고상한「크리스천 클럽」이었다. 자선단체의 얼굴을 한 이 회사는 평소 국회의원에 출마할 사람들의 재력을 조사해 놓고 있다.
어디서 국회의원 보궐 선거가 있다 하면 이 회사는 바빠지기 시작한다. 먼저 돈을 많이 쏠만한 후보를 찾아가 상담을 벌인다. 표의 단가를 흥정하는 협상이다.
물론 여러 후보를 다 찾아보고 값을 가장 많이 쳐주는 후보 쪽과 계약을 한다.
이 회사의 상품은 유권자들의 기권표와 돈을 주고 산 표다. 사원들이 대신 투표를 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당선된 후보를 사람들은「미스터 모스트」(Mr.Most)라고 불렀다. 돈을 가장 많이 들여 당선되었다는 뜻이다.
다행히도 이것은 요즘 얘기가 아니다. 1774년 영국 어느 선거구의 경우 2백10명의 선거인(그 무렵 영국은 제한선거였음) 가운데 1백90명이 매수되어 있었다.
리버풀항 선거구에는 후보들의 운동 사무실마다 이런 깃발이 나부낄 정도였다. 「여기 오시면 표를 사 드립니다」.표 값도 주식모양으로 오르락내리락 했다. 투표일에 임박해 상륙하는 선원들은 한 표에 50파운드씩 팔기도 했다. 그전 시세로 15파운드 하던 값이 그렇게 세가 나는 것이다. 그 무렵 영국의 50파운드는 우리 돈으로 15만원쯤 된다.
아일랜드의 어느 선거구에선 한 후보가 타락선거를 보다 못해 목사에게 일요 설교를 부탁했다. 표를 팔고 사는 행위는 지옥에 가는 일이라고 꾸짖어 달라는 것이었다. 목사가 그 설교를 하고 난 다음날, 길에서 어떤 후보를 만났더니 불평이 대단했다. 그 설교가 있고 나서 표 값이 20파운드에서 40파운드로 폭등했다는 것이다. 표가 귀해졌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남의 나라 옛날 얘기하고 있을 형편이 아니다. 바로 동해시에서 요즘 벌어지고 있는 선거 풍은 2백년전 영국과 별로 다른 것이 없다. 우리는 세월을 거꾸로 가도 한참을 가고 있는 것 같다.
오죽하면 선관위는 모든 후보와 사무장들을 무더기로 고발해 놓고 있겠는가.
이회창 선관위원장은『법은 지기라고 있는 것이지, 짓밟으라고 있는 것은 아니다』는 격앙된 서한을 각 정당 대표 앞으로 보냈다. 바로 국회의원 선거법엔「선거범으로서 10만원 이상의 벌금형 선고를 받은 후 6년을 경과하지 않은 자」는 국회의원이 될 수 없게 명시되어 있다.
요즘 동해시의 선거 광란은 재 재선거의 진풍경을 보여 주려는 쪽으로 가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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