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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 곳곳에 책이 열리게 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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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문화의 다양성과 공동 가치'를 모색하는 국제 학술회의가 24일 경북 경주에서 개막됐다.

문화의 다양성과 창조성을 강조하면서 자문화 중심주의에서 벗어나 공존과 교류, 이를 통한 새로운 문화 창조가 인류 모두의 가치임을 논제를 통해 확인하고 풀어가는 자리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조직위원회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공동 주관한 이번 행사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월 소잉카와 '드림 소사이어티'의 저자 롤프 얀센, 세계학 분야의 권위자인 롤랜드 로버트슨, '옥시덴탈리즘'의 저자 샤오메이 천, 일본의 영화감독 마에다 겐지(前田憲二) 등이 참가했다.

우리나라에선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중앙일보 고문)을 비롯해 서울대 김경동 교수, 안동대 임재해 교수, 김문조 고려대 교수, 서강대 강정인 교수, 건축가 김진애씨 등 국내외에서 모두 32명이 토론에 나섰다.

이날 첫 기조강연에 나선 소잉카는 '대화의 벡터들'이란 제목으로 '세계로 열려 있는 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모든 사람에게 노출된 책은 다른 사람과 사회.문화 속으로 흘러들어가 인류 공동체의 진보와 변화를 끌어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구촌엔 교류의 매체인 책이 닫혀진 곳도 있다"고 지적했다. 노예화 또는 권력.통제라는 도그마 때문에 정신적인 제약을 강제받는 일도 벌어진다는 것이다.

소잉카는 최근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탈레반의 대규모 문화유산 파괴 사태에 대해 "부처상(像)은 파괴할 수 있지만 부처의 세계관은 지속될 것"이라며 "누구라도 사고와 상상력을 뿌리째 뽑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특히 탈레반이 책을 금지시킨 것을 개탄했다. 그는 책이 있는 곳이라면 인간성은 보증된다고 강조했다.

소잉카에 이어 이어령 박사는 '문화의 다양성과 공존을 위한 네가지 조건'이란 두번째 기조강연을 했다. 이 박사는 "경주에 있는 길은 천년 전 스님이며 시인이었던 월명이 피리를 불며 밤길을 가면 달도 운행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는 그 길거리일지 모른다"며 "경주는 신화와 역사가 융합된 토포(topos:개념)"라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신라의 정신이었던 원효대사의 원융회통(圓融會通)을 끄집어 내 오늘날 인류가 마주치고 있는 문명의 난제를 푸는 키워드로 삼을 것을 제안했다.

이박사는 원융회통을 영어로 옮기면 '원'은 circle '융'은 fusion '회'는 encounter, 그리고 '통'은 communication이라며, 다양함을 인정하면서 같은 공동체를 지향하는 정신이라고 해석했다.

또 다양하고 동적인 문화를 발 붙이게 하려면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서구식의 이항대립적 문화 코드가 지배하는 선형적 사고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대안은 승패가 선형적으로 고정된 바위-보가 아니라 그 사이에 가위를 넣어 상황에 따라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는 원형적인 순환구조인 원융회통의 문화라는 것이다. 선형시스템은 대립과 차이를 낳지만 원형적 구조는 융합을 만들기 때문이란 것. 그는 "20세기는 양자택일의 싸움이었지만 21세기는 양자병립의 시대"라고 주장했다.

이박사는 뉴욕의 9.11테러와 50억 인구를 열광시킨 한.일 월드컵을 예로 들면서 "지구촌은 최근 들어 문명의 충돌과 융합을 동시에 체험했다"며 "이 모순을 해결하려면 헌팅턴의 문명 충돌설과 후쿠야마의 보편주의를 넘어서는 원융회통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필요하다"며 말을 맺었다.

개회식엔 이창동 문화부 장관과 이의근 경북지사 등이 참석했다. 또 서울대와 연세대.경북대 등 소속 대학원생 50여명도 기조강연을 들었고 경주서 활동하는 화가 박대성씨와 소설가 강석경씨도 자리를 같이 했다.

이번 학술회의는 26일 토론의 결과물을 중심으로 '경주선언'을 채택한 뒤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경주=송의호 기자<yeeho@joongang.co.kr>
사진=조문규 기자 <chom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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