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청문회」불찰로 깊은 좌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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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청문회 스타」로 각광받아온 민주당의 노무현 의원(43·부산동구)이「제도권정치」에 대한 좌절과 실망을 이유로 돌연 의원직 사임서를 제출하고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재야로의 복귀」를 선언해 정가에 파문을 던지고 있다.
정치인의 가장 큰 무기인 대중의 인기를 초선의원으로선 드물게 많이 받아온 노 의원의 사퇴는 그만큼 궁금증을 더해주고 있다.
중간평가 대결국면의 막판에 던진 그의 사퇴서는 그 국면 며칠 전에 있었던 김용갑 총무처장의 사표와 미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더욱 주목을 끌고있다.
그의 사퇴는 전격적으로 이뤄졌으나 결코 우연하거나「돌발적인」행위는 아니라는 게 주변의 설명이다.
사퇴의 배경에는 국회의 무력과 한계에 대한 뼈저린 실망감, 변호사생활과 함께 그의 경력 자체였던 노동운동에 제대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과 고뇌가 기본적으로 깔려있다는 것이다.
그는 노동위에서 노사분규의 해결, 노동자의 권익보호에 대해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의욕적인 방안을 제시했지만 정부·여당의 무성의와 외면에 점차 심각한 회의를 느껴왔다. 동료의원들의 소극적 자세에도 큰 실망감을 표명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지난 2월 현대중공업. 풍산금속 노사분규 등과 관련한「노동청문회」개최를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으나 사실상 무산돼 깊은 좌절을 맛본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이 사퇴에 이르기까지의 결정적인 동기의 하나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주변에선 분석하고 있다.
노 의원은 사퇴서를 국회의장에게 발송한 후 20일 저녁 김영삼 총재를 만났을 때『4당 간사간에 현대중공업청문회를 하기로 했으나 다른 당에서 결정을 번복, 충격을 받았다. 의원직을 수행할 의사가 없다』고 얘기한 것으로 알려졌을 만큼 노동청문회의 실패가 그에게 미친 영향이 큰 것 같다.
그의 사퇴에는 제도권정치의 4당 구조에 대한 강한 불신감도 깔려있다. 그것은 재야 순수파 정치인의 기성정치권진입실험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지난 부실기업 청문회에서 로비행위를 꾸짖기도 했다. 「노동자의 편」임을 자임, 대기업에 공격적일 수밖에 없는 그는 대기업이 제도권정치에 미치는 영향력을 본능적으로 거부해 왔다. 『푼돈이든 목돈이든 의원을 찾아다니지 말라』고 증인으로 나온 윤석조 씨 (전 대한선주사장)를 몰아세웠지만 비중은 특위를 향한 각종 로비에 대한 경종이었고「시위」였다.
특히 정부측의 무성의한 태도에 대한 불만은 폭발적이었다.
지난해 12월말 현대중공업 노사분규현장에 참석해서 한 발언이 잘못 전달돼『파렴치한 소영웅주의자』로 일부에서 매도하자 며칠간 밤잠도 못 자고 괴로워하는 등 심한 좌절감을 겪었다.
중평과 관련한 의원직 사퇴서 제출을 주장해 동료의원들의 냉담한 반응을 받은 후『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다』고 괴로움과 고뇌를 털어놓기도 했다.
노 의원의 한 비서관은『20일쯤 중평실시를 발표할 것으로 판단, 불신임투쟁에 결연히 나서겠다는 의지표명의 의미가 있다』고 사퇴서 제출의 또 다른 이유로 설명하고 있다.
이 같은 그의 사퇴배경은 김용갑 장관의 극우보수의식에 못지 않게 반대편의 급진개혁 흐름이 뚜렷이 존재함을 보여주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김 전 장관이 좌경확산의 경종을 울리려고「충격요법」을 썼다면 노 의원은 민중의 목소리를 극적으로 전달하기 위한「자폭선언」으로도 이해됨직하다는 분석이다.
그의 건강악화도 사퇴이유의 하나다.
의원이 된 이래 일요일마다 회관에 나와 노동대책·청문회·상임위활동준비를 한다는 것. 그는 현대·모토로라·풍산금속·대우정밀 등 분규가 있는 대규모 노동현장에 모두 찾아가 사태를 현장감 있게 파악했고 그쪽에선 노 의원에게 상당한 기대감을 표시해왔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노 의원을 설득, 의원직 사퇴서를 철회토록 할 방침이나 그와 가까운 사람일수록『그의 심경을 바꾸기에는 너무나 늦었다. 그의 사퇴 밑바닥에는 현재의 정치행태와 정책결정과정에 대한 근본적 불신이 깔려있다』고 말해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을 것 같다고 전망했다. <박보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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