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에서] 학생수칙서 '검소·겸손' 퇴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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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중국에 물신(物神)을 숭배하는 분위기가 넘쳐난다. 모든 것을 돈과 물질적 부(富)로 평가하는 풍조가 웬만한 서방 선진국을 저리 제쳐놓을 만큼 팽배해지고 있다.

개혁.개방에 가속이 붙으면서 경기가 고공행진하고 거기에 중국인 특유의 세속주의 성향이 더해지면서 생겨나는 현상이다. 자동차, 호화 별장, 멋진 애인, 유명 브랜드의 옷 등이 요즘 '잘 나가는' 중국인들이 갖춰야 할 필수 조건들이다.

이런 분위기를 집약한 하나의 현상이 요즘 눈길을 끈다. 중국 경제의 견인차로 불리는 상하이(上海)시의 초.중.고교는 '학생 수칙(守則)'의 내용을 바꿨다. '검소한 생활'이라는 덕목을 빼고 '외국 손님을 존중하라'는 수칙을 새로 넣었다. '겸손하라'는 항목도 없애고 '국제적 시야를 넓히라'는 충고를 담았다. 마약을 멀리하고 신용을 지키라는 수칙은 남겨뒀다. 그런대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물론 반론이 거셌다. '검소한 생활'과 '겸손'이라는 전통적 미덕이 빠진 데 대해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적 품성을 왜 뺐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의견이 인터넷에 앞다투어 올라오고 있다. 외국 손님을 존중하라는 대목에 대해서도 "물질만능 사고이며 상하이 사람들이 외국인 투자 유치를 위해 내놓은 속물적 사고방식의 산물"이라는 비판이 따른다. 심지어 "걸핏하면 시골 사람들을 깔보는 상하이인들이 외국인을 존중하라고 하는 게 웃긴다"고 비꼬기도 한다.

그런 반론은 성장의 그늘에 가린 더 많은 중국인들의 비애를 담고 있다. 상하이와 베이징(北京).광저우(廣州)를 제외한 내륙의 여러 도시, 나아가 9억 가까운 인구의 농촌은 아직 빈곤의 음지에서 신음한다. 화려한 대도시 빌딩의 어두운 그림자 속에서는 월급 3백위안(약 4만5천원)을 받고 하루를 근근이 넘기는 가정부.막노동자들이 넘친다. 검소함과 겸손함이 빠진 상하이시 초.중.고교 학생수칙은 물질적 풍요에 산란해진 중국 사회의 '도덕 상실(喪失)'을 보여주는 증표인 게 분명하다.

유광종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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