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투표 과연 최선인가-성병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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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요즘의 정국동향으로는 대통령의 신임을 건 국민투표가 임박한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이 지방 연두순시를 하면서 공약성 사업계획을 발표하고 취임1년을 기해 대대적인 도시 영세민과 농어민 지원대책을 내놓고 있다. 여당은 중간평가 체제로 돌입하고 있다.
그러나 틀림없이 국민투표를 치르게 될는지는 그동안 여야 정당의 당논이 너무나 춤을 추었기 때문에 두고볼 일이다.
재작년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의 신임을 건 증간평가를 공약했던 집권 측은 그 공약 수행의 위험부담을 피해 보려고 갖은 궁리를 다했다. 위헌논을 내세워 대통령 신임 문제를 결부시키지 않으려고도 했고, 평가방식으로 국민투표가 아닌 국회 표결이나 심지어 여론 조사까지 검토했다. 중간평가의 시기를 임기중간 이후로 미뤄보려고도 했다.
공화당을 제외하면 야당 쪽도 왔다 갔다 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집권 측이 회피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면 국민투표를 해야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집권내부에서 정면 돌파론이 커지면 뒤로 미루거나 적당히 넘어갈 수도 있다는 유화론으로 돌아서곤 했다. 분명한 입장이 없이 집권 측을 궁지로 몰아붙이는「청개구리식 정치」를 해온 셈이다.
현재의 불안하고 정돈되지 않은 정국을 타개하는데 대통령의 신임을 건 국민투표는 하나의 방법일 뿐 결코 최선의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 여러모로 위험부담이 있다.
독재자들이 흔히 쓰는 통치방식이라는 비판은 차지하더라도 국민투표 이후 우리 정치에서 권위주의적인 요소가 되살아날 위험성이 다분히 있다.
현재로선 국민투표를 한다고 해서 집권 측이 꼭 승리하리란 보장은 없다. 3김씨가 합심해 그 반대운동에 나서면 지난번 양대 선거처럼 투표의 지역성이 재연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여당은 국민의 안정희구 심리에 호소하겠지만 그것이 뿌리깊은 지역성을 얼마나 억제할지는 분명치 않다. 언론 상황도 집권 측에 유리하지 않다. 이런 심각한 위험 부담에도 불구하고 국민투표를 하겠다고 할 때는 현재의 곤혹스런 정치상황을 깨겠다는 어떤 각오와 구상이 있다고 봐야한다.
국민투표에서 이겼을 때 집권 측은 비상한 각으로 그 구상을 실현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나 제도적으로는 국민투표에서 이겼다고 해서 대통령의 헌법상 권한이 강화되는 것도, 국회가 해산되는 것도, 여소 야대의 상황이 해소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대통령의 권위가 올라갈 뿐이다.
모든 것을 걸었던 국민 투표에서 다수국민의 신임을 얻고도 국면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그대로 견디려 하겠는가. 국민의 신임을 얻고 강력 정치에의 유혹에 빠져들 위험이 증대하리라 봐야한다.
그러면 국민투표에서 질 경우는 어떤가. 10·26이후 상황처럼 아무도 앞날을 예견하기 힘든 불확실성 시대의 재판이 될 것이다.
혼돈의 과도기를 거쳐 결국 정치세력간에 선의의 경쟁을 통한 집권자의 결정이 이뤄질는지, 또 다른 역사의 후퇴로 이어질는지 과연 누가 지금 확실한 전망을 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어느 모로 봐도 최선이랄 수 없는 신임 국민투표로 상황이 몰리게 된데 우리정치의 한계와 불행이 있는 것 같다.
원인이야 여하튼 6공 출범 이후 우리 나라의 민주화가 진전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언론자유가 신장되고 사회 각 부문의 자율폭이 넓어졌다. 그에 따라 기대가 폭발적으로 상승되고 늘렸던 욕구가 분출하고 있다.
자유와 자율의 신장은 원론적으로는 좋은 것이지만 불편한 사람들이 많이 생긴다. 정부가 해결해주던 노사문제를 당사자들의 자율에 맡기니 기업들이 불편하다.
더구나 근로자들의 기대가 일부 과도하게 폭발하는 경우 그 불편은 기득권층 일반의 불안으로 확대된다. 비단 노사문제뿐인가. 자유화와 관련된 모든 사안이 그런 측면을 지니고 있다. 이런 불편과 불안이 결국 강한 공권력에 대한 요구로 나타나 이들 안정희구 층을 중요기반으로 하는 집권세력을 압박하고 위기감을 자아낸다.
구태의연한 야당의 정치 행태 또한 이같은 위기의식을 더하는 요인이다.
여대시절에는 야당이 아무리 반대를 일삼아도 집권 측은 필요한 일을 할 수 있어 위기로까지 가지는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같은 야대 상황에서는 야당의 반대로만 나가는 체질은 국정을 마비시키기 십상이다.
야당이 그토록 입만 열면 되뇌는 반민주 악법 중 지난 1년간 야대 국회에서 개정된 것이 몇 개인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중간평가 문제만 해도 여측의 움직임과는 반대로 엇나가기만 했으니 지금 야당이 연기 쪽으로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다 해서 그러면 좋다하고 쉽게 물러설 수가 있겠는가.
그렇더라도 국민투표만이 이 국면을 뚫을 유일·최선의 방법이 아닌 이상 4당총재들이 국민투표를 회피하고 넘어갈 방법은 과연 없는지, 국민 투표를 하더라도 국민과 민주정치를 볼모로 걸지 않아도 좋을 순한 방법이 없겠는지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았으면 한다. 국민들은 불안의 증폭도 원치 않지만 민주화의 후퇴는 더욱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편집국장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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