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한국교포 이영숙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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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영영 다시 밟아볼 것 같지 않던 서울에서 제 환갑을 맞게되다니 꿈만 같습니다.』
35년째 헝가리에 살고 있는 한국교포 이영숙씨(60)는「서울」이란 말만 떠 올려도 콧날이 시큰해진다고 했다. 지난 87년11월 김포공항에서「생이별 37년」의 한을 푼 그는 또다시 조국 땅 서울에서 구순을 바라보는 노모께 큰 절을 올릴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질 않는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이 모든 것이「자랑스런 조국」과 헝가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는 덕분이라며『그런 뜻에서라도 저는 두 나라사이의 관계를 돕기 위해서라면 물불을 가릴 수 없는 입장』이라고 현재 부다페스트에서 2백km쯤 떨어진 헝가리 제2의 공업도시 미시콜시에서 시립종합병원 원장인 남편「디트로이·산도르」씨(65)와 살고 있는 그는 이미「한·헝가리를 잇는 민간외교관」으로 꼽힌다 80년대 이후 두 나라 사이의 스포츠·문화·경제 등 각 방면의 교류가 늘면서 그는 그때마다 통역 뿐 아니라 김치찌개 끓여주기, 병원 진료 알선, 양국의 문물 소개 등을 위해 만사 제쳐놓고 뛰어다녔던 것이다.
6·25가 닥치기까지 경성의전 부속병원(현 서울대병원)에서 간호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서울이 함락되는 바람에 배한 부상병 치료에 강제 동원됐다가 9·28수복 때 북한으로 끌려가는 등 민족분단의 비극을 고스란히 겪었다. 평양의 헝가리 병원에 배속됐다가 만난 사람이 현재의 남편「디트로이·산도르」씨. 의무장교로 북한에 파견됐던 그와 결혼하고 55년 12월 헝가리로 이주해 두 딸을 낳았다.
멀지 않아 삼성 반도체에 입사할 예정인 큰딸「디트로이·에바」씨(33)는 현재중학교 화학교사이며 큰사위는 유명한 물리학자.
헝가리 국가대표 체조 선수였던 작은딸「에디트」씨(31)는 현재 체조 코치이고 작은사위는 의사다.
22세 때 한국에서의 간호원시절에 느닷없이 가족과 생이별한 이씨가 마침내 망향의 한을 풀게된 것은 지난 87년11월. 서울에서 열리기로 되어있던 국제 레슬링대회의 헝가리 대표단 통역으로 고국 땅을 밟는 순간 85세가 된 노모 이연수씨의 가슴에 안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 감격스런 재회는 참으로 오랜 우여곡절 끝에 이뤄졌다. 헝가리에 오는 한국인들을 만날 때마다 서울의 가족들을 찾아달라고 애원하면서 이씨는 자신의 생존을 알리는 편지를 50년 당시의 서울 주소로 수없이 띄웠지만 늘 무소식. 마침내 82년 헝가리에서 열린 세계 여자 핸드볼 선수권대회 때 만난 한국 선수단의 적극적인 도움과 적십자사외 주선으로 고향을 찾았다는 이씨는「평생을 두고도 다 갚을 수 없는 고마운 분들의 은혜」에 거듭 감사한다고 했다.
서울에서 열리는 무역 박람회 헝가리 참가단을 돕기 위해 오는 4월말께 또 다시 조국을 찾으면 87세의 노모와 네 동생들의 축하 속에 환갑을 맞게되리라는 기쁨으로 지레 잠을 설치기 일쑤라며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 부다페스트=김경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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