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의 아니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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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사자는 말이 없는데 일본 수상의 말 한마디는 공연히 세계 많은 나라 사람들의 심경을 건드리고 있다.
「다케시타」 수상은 일왕의 사거에 관한 조의담화에서 『본의아니게 발발한 지난번 태평양전쟁』이라는 표현을 했다. 한마디로 태평양전쟁은 「일왕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얘기다.
일왕 유인의 소화63년중 20년동안을 그의 포압정치에 짓눌러 살아온 우리는 그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기엔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아무리 과거를 잊기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이라고는 하지만 바로 눈 앞의 역사까지 뒤집으려는 것은 참기 어려운 일이다.
첫째, 일본의 전전헌법은 「천황」을 일본의 주권자, 군통수권자, 통합의 상징, 일본 신도의 최고 사제, 현인신, 일본문화의 정화로 정의하고 있다. 태평양전쟁무렵엔 일본 제국육군이 정책결정을 주도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그 위엔 엄연히 일왕이 군림해 있었다.
둘째, 1936년 일본육군의 「2·26쿠데타」 음모는 일왕의 결단으로 분쇄되었다. 그 음모엔 군수뇌들이 많이 동조했었다. 그러나 일왕은 그들의 주장을 억제할 힘을 갖고 있었다. 일왕 자신이 군복을 입고 허리에 칼을 차고 다니는 모습은 사진으로도 남아있다.
세째, 일왕은 1975년 미국방문에 앞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런 사실을 밝혔었다. 태평양전쟁 종결당시 각의가 합의를 이루지 못해 일왕이 나서서 결단했었다는 것이다. 전쟁을 끝내는 일을 결단할 정도면 전쟁을 시작하는 결단도 내릴수 있었을 것이다.
네째, 일왕 자신의 증언이다. 1945년 9월27일 일왕은 「맥아더」사령부를 방문, 이런 말을 남겼다.
『저는 국민이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정치, 군사 양면에서 행한 모든 결정과 행동에 대한 전책임을 지는 자로서….』
그때 일왕은 문무 백관을 임명한 것은 자기이므로 그들에게는 아무 책임이 없다는 말도 했다. 일왕의 「본의」는 독버섯처럼 사방에 돋아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우리는 과거를 용서할 수는 있어도 잊어버릴 수는 없다. 일본이 지금 해야 할 일은 과거를 미화하는 노력이 아니라 과거를 과거대로 인정하는 용단과 겸손을 갖는 일이다. 그래야 일본은 새일왕과 함께 다시 태어날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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