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생각 달라도 독대 사라져 설득 못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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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에서 2년3개월 동안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이희범 한국무역협회장이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 운영 스타일을 비판했다.

이 회장은 17일 서울대 행정대학원에서 원생을 상대로 한 '장관의 리더십'주제의 특강에서 ▶대통령과 장관들의 독대(獨對.일대일 면담)가 사라져 솔직한 의견 전달이 어려워졌고 ▶청와대 수석들에게 힘이 실리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방사성 폐기물 처리장을 둘러싼 부안사태나 부산 천성산 터널을 둘러싼 갈등을 예로 들며 자신의 임기 중 인기 없는 정책을 회피하려는 고위 공무원들의 태도를 꼬집었다. 이 회장은 지난 2월까지 산자부 장관을 지낸 뒤 곧바로 무역협회장으로 부임해 '낙하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 대통령과의 '스킨십' 문제 제기=이 회장은 강의 도중 "대통령에게 어떻게 업무를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예전에는 (장관이 대통령과) 독대하는 게 보통이고 여기에 청와대 수석이 함께해 수석에게 힘이 실렸는데 (요즘엔) 수석은 현황 파악만 하고 협의체로 진행된다"고 소개했다. 그는 협의체 국정 운영에 대해 "장점이 많았지만 단점도 있다"며 "장관 입장에서는 남들이 모르는 얘기를 대통령과 하고 싶지만 (그럴 기회가 없어지면) 최고 통치자가 생각이 달라도 설득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그는 "나는 대통령과 독대 보고를 해 내 의지를 전달하고 건의도 했다"며 "에너지 정책이나 여러 안을 가져가서 독대 보고와 협의체 운영을 통해 내 뜻을 전했다"고 덧붙였다.

이 장관은 장관 임명 및 퇴임 일에 대통령과 함께했던 일화를 소개하며 '스킨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대통령이) 임명장을 주신 날 나와 집사람을 (청와대에) 들어오라고 하시더니 식사를 하면서 허심탄회하게 의중을 얘기하더라"며 "그만두는 날도 이야기를 나눴는데 방폐장이나 수출 등 여러 사안에 대한 대통령의 속마음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 "공무원 님트(NIMT)가 문제"=이 회장은 공무원들이 임기 중 중요한 결정을 내리지 않으려는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부안사태 같은 대형 국책 프로젝트가 지연되는 것은 (공무원들의)'님트'라는 병 때문"이며 "님트는 'Not In My Term(임기)'의 준말"이라고 했다. 그는 "주민들의 복지가 어찌 되든 말든 공무원들은 님트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천성산 사태는 (지율) 스님 때문에 수조원이 낭비됐다"며 "대형 국책사업은 갈등의 연속인데, 장관의 리더십보다는 투명성이나 신뢰성을 높여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공무원들의 권위적인 행태도 도마에 올렸다. 이 회장은 "서울산업대 총장 시절 교육부에 예산을 따러갔더니 (담당 공무원이) 소파에 앉으란 말도 하지 않고 세워둔 채 총장들이 예산타령만 한다고 핀잔을 주더라"며 "장관이 된 뒤 직원들에게 역지사지(易地思之)하라고 누누이 얘기했다"고 했다.

그는 또 "고시 패스한 사람(고위 공무원)이 현장을 아느냐"고 반문한 뒤 "공무원들이 똑똑해야 하지만 이에 앞서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따뜻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이날 강연 내용에 대해 "필요할 경우 대통령과 장관의 독대가 필요하다는 취지일 뿐 협의체 시스템에 문제가 있다는 뜻은 아니다"고 해명했다.

나현철 기자

◆ 이희범 한국무역협회 회장은=공대 출신으론 처음 행시(12회)에 수석 합격했다. 수출과장과 주미 상무관.산업정책국장.자원정책실장 등 산자부 내 요직을 두루 거쳤다. 2001년 4월부터 산자부 차관을 지냈고, 이후 한국생산성본부 회장과 서울산업대 총장 등을 거쳤다. 2003년 12월 산자부 장관에 임명됐다. 친화력이 좋아 정.관계와 학계.재계.법조계.언론계에 지인이 많다. 경북 안동 출생으로 서울사대부고, 서울대 전기공학과.행정대학원을 졸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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