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한획 살아 움직이는 서예|석전 황욱옹 서예전을 보고…김기승<서예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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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세계적으로 정치·경제·문화·체육등 각 방면에서 다사다난했던 88년이 저물어 가는 세모에 정도, 곧음을 내세우고 사계를 놀라게 한 전무후무의 서예전이 개최되고 있다.
이는 노익장의 본을 보여주는 석전 황욱의 악필경세의 서예전(9∼26일·중앙일보사 호암갤러리)이다.
예기에 『늙었으니 자식에게 가독을 물려 주라』(칠십왈노이전)고 했으며 『80∼90에는 정신이 혼미해서 잊기를 잘한다』(팔십구십왈호)고 했다. 그런데 석전은 망백(91세)의 고령인데 매일 붓을 잡고 휘호하기를 경직장암함이 노송이 바람을 맞아 생동하는 듯하고 그 전아온윤함은 장강의 임파시류동하는 것 같으니 그 조예의 깊음을 가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논어에 공자가 말하되 『곧도다! 위나라 사어는 나라에 정도가 행하여져도 실대같이 곧았고, 나라에 정도가 행하여지지 않아도 살대같이 곧았으니 군자로다』(직재! 사어 방유도여시 방무도여시 군자재)고 했다.
석전은 이 난세에도 『직막사어』(정도의 사어를 사모한다는 글귀)로 살아왔다.
뿐만 아니라 1백여점의 글들이 이 세대, 이 시국에 맞는 문구들이다.
석전은 대체로 행서를 많이 썼다. 특히 초서에는 해서의 정에 대하여 동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움직임에서 리듬을 느끼게 되는 것은 작자의 감흥에 의해서다.
석전의 미각 감동이 깊어가고 커질수록 문자에는 자연히 그것이 반영되는 것이다. 리듬은 속에 있는 것인데 밖으로 나타나는 결과다. 이에 반해 외적 리듬에 의해 내적 감정을 자극하게 되어 다음 발전의 계기를 얻게된다. 그래서 리듬이 오히려 주체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는 까닭에 문자 전체구성의 주도적인 입장에 서서 움직이게 되는 것이나, 이렇게 보면 초서를 이루는 것은 리듬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초서의 미적 효과를 결정하는 리듬의 역할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가를 생각지 아니할 수 없다. 리듬에 의해 일어나는 음향이라 할는지, 여운이라 할는지, 리듬에 특히 초서의 가치를 두고 있는 것은 실로 이런 의미에서다.
석전의 이번 전시작품은 문구부터가 애국·애족·충성심의 발로이고 글씨는 검직장엄하며 서체로서 특히 리듬이 풍요한 여운·여정의 한자 한획에서 백아의 탄금성을 듣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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