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캘린더] '회화 2000:10인의 일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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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이 가는 한 흐름은 거대함이다. 작업실이나 전시장이 작아 하고 싶은 작품을 못한다는 작가들의 푸념을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국제 비엔날레를 축으로 대형 설치나 영상 작업이 늘어나는 최근 미술계 경향은 '크기'에 강박을 느끼는 왜소화한 미술 정신을 방증한다고 말할 수 있다.

26일까지 서울 견지동 동산방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회화 2000:10인의 일상'은 이런 현상을 유유히 거스르는 작은 그림전이다.

전시를 기획한 미술평론가 김용대씨는 10명 화가들에게 1호 작품을 내달라고 부탁했다. 한국에서 흔히 그림 규격을 잴 때 쓰는 1호(號)는 단행본 책만한 크기다.

김씨는 "권위적이지 않고 예쁘되 관람객이 얕잡아볼 수 있는 그림이면서도 수백 쪽의 책 내용이 표면으로 떠오르 듯한 그림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전시 제목처럼 작가들이 그린 것은 '일상'이다. 옛 문인화가들이 손길 닿는 곳에 두었던 문방사우와 풀꽃.곤충을 그렸듯 화가들은 생활 속에서 묵은 체험들을 담았다.

조순호씨가 한지에 수묵으로 펼친 '비'(사진)는 허만하 시인의 시 '비는 수직으로 서서 죽는다'를 떠오르게 한다. 땅으로 떨어지는 부드러운 물이 화면에 배어 있다.

근사한 재현이 아니라 작가에게 의미 있는 정물이다. 동양화 전통의 강한 정신성 때문에 주눅들어 있던 한국화가들이 경쾌하게 그어가는 붓질은 김식.김흥모.오숙환.송수련.이길원.이종목.이철주.최창봉.홍순주씨 모두의 화폭 위에서 춤춘다. 일기 적듯 그린 이들의 수묵화와 채색화는 현대적 의미의 정물화다.

전시기획자인 김씨는"1층부터 3층까지 작품을 진열한 전시 공간이 제2의 작품이 되도록 시도했다"고 밝혔다. 작지만 힘있는 그림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게 하는 화폭으로서의 전시장이 관람객을 맞고 있다. 02-733-5877.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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