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문회장의 건망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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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광주 청문회를 보면 지난번 일해재단청문회 보다는 분위기에 있어서나 신문내용에 있어서나 개선된 점이 많았다.
그러나 증인의 증언자세나 당략 성 노출 등 여전히 고쳐지지 않는 문제점도 노출된 것이 사실이다.
일해재단 청문회 때도 그랬지만 무엇보다 증인으로 나온 전 공직자의 증언자세가 문제였다. 진실 규명을 목적으로 하는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온 이상 당시의 자기 역할과 상황 전개의 실상을 아는 대로 숨김없이 증언하는 것이 증인의 책임이다. 그런데도 진실증언을 미리 선서까지 하고서도 증인이 『기억이 없다』『법률지식이 없어 모르겠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고 책임을 회피하는 현상이 이번에도 계속되었다.
광주사태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었던 이희성씨는 상식적으로 자기가 모르기 어려운 문제까지 포함해 많은 질문을 이런 방식으로 넘김으로써 진실규명의 노력에 별로 협조하는 자세를 보여주지 못했다.
당시 계엄사령관으로서 병력의 배치, 작전의 상황, 포고령이나 발표문의 내용 등을 그가 모른다, 또는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 것은 국민이 보기에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고위군 지휘관이 전문적 법률지식을 갖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자기의 서명으로, 자기 이름으로 발표된 포고령의 법적 근거나 타당성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는 것도 수긍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런 그의 증언은 당시 상황을 아직도 덮고 축소하려는 의도로 밖에 보이지 않고, 당시 자기가 수행한 역할에 대해 공인으로서 성실하게 책임을 지려는 자세로도 보이지 않는다.
자기 이름으로 한 일이나 결과적으로 자기 책임이 될 일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모르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그의 참모나 다른 사람에 의해 이뤄진 일이라고 볼 수도 있고, 그렇다면 그런 일이 누구에 의해 이뤄졌는지, 자신의 개입 정도는 어느 수준이었는지는 밝히는 것이 옳은 태도일 것이다.
전 공직자들의 이 같은 책임회피성증언을 방지하고 보다 능률적인 사실 규명을 위해 국회로서는 증인의 당시 핵심측근을 함께 증인으로 채택하거나 증인이 대동케 해 그의 도움을 받아가며 증인이 증언토록 하는 방법도 강구함직 하다고 본다. 고위 공직자일수록 구체적 내용을 일일이 알고 있기는 어렵다는 일반적인 사정이 있다고도 볼 수 있으므로 구체적 내용을 아는 당시의 핵심 측근을 함께 부른다면 기억이 안 난다는 증언으로 넘어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광주청문회의 또 한가지 눈에 거슬리는 일은 당략성의 지나친 표출이었다. 민정당 측은 제한된 청문회시간을 가급적 자당이 많이 차지할 작정으로 전원 신문에 나서기로 해 시간 끌기 작전을 하는가 하면 야당들은 증인으로 나온 김대중 평민당총재에게 더 물어볼 여지가 없는 질의를 던지고 확인을 받아내곤 했다. 당의 입장을 완전히 떠날 수는 없겠지만 어디까지나 본안의 사실규명에 초점을 둔다는 냉철한 자세를 의원들은 견지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청문회의 진행은 매우 느렸다. 심야까지 청문회를 강행하면서도 겨우 2명에 대한 신문도 끝내지 못했다. 좀더 능률적 진행을 위해서는 단문 단답형이 보다 활용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루의 청문회 결과로도 적잖게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다. 5·17 전에 이미 국보위 논의가 있었다는 사실, 정치활동을 금지한 포고령이 위헌이었다는 사실 등이 확인되었다. 국회는 좀더 속도감 있게 진실규명의 노력을 적극화 해주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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