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영웅주의자」대 「운동권 대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언론통폐합 주역 허문도씨>허문도씨가 전두환 정권과 첫 인연을 맺은 것은 80년2월 초였다. 그는 79년 초 조선일보 주일특파원을 마치고 외신부차장으로 발령 받았으나 입사2기후배가 외신부장으로 오자 사표를 내고 주일공보관으로 갔다가 10·26을 맞았다.
동경대학에서 명치유신시대이후의 국가형성과 근대화과정을 연구한 그는 일본의 천황주의와 국수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일찍이 그는 유학시절 김종필 당시 공화당의장에게 자신의 우국충정론을 편지로 써 보내기도 하고 박준규씨 등 여당정치인에게 접근을 시도한 적이 있다.
10·26을 그는 기회로 받아들였다. 80년2월 해외공보관 회의를 빌미로 일시 귀국한 그는 고교동기인 D주택사장을 통해 12·12세력의 핵심인 K대령을 만난다. 거사를 해놓고 사후처리를 고심하고 있던 K대령에게 그는 『지금이야말로 군부가 나서야한다』고 용기를 북돋우고 함께 일하고 싶다는 포부를 피력한다.
K대령은 그를 전두환 보안사령관에게 소개한다. 첫 만남은 30분간이었다. 허씨는 『최규하씨나 3김으로는 새 질서를 창출하지 못한다. 힘을 바탕으로 판을 흔들어 군부가 잡아야한다』 고 주장했다.
당일 전 사령관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동경으로 돌아간 허씨는 군부로부터의 부름을 학수고대한다. 4월14일 전 사령관이 중정부장서리를 겸임하면서 불려온 그는 중정부장비서실장을 맡는다.
일본의 일부 언론인·학자들을 동원해 군부 세력부상이 불가피하다는 글을 받아 번역해 고급공무원들에게 배포하는 등 신군부 집권분위기조성에 1역을 맡았다.
국보위발족과 함께 문공분과위원이 된 그는 공직자숙정·과외금지·삼청교육·언론통폐합·중화학공업정리 등 세상을 깜짝깜짝 놀라게 한 초법률적 조치의 입안에 깊숙이 개입했고 이어 전두환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청와대정무비서관으로 옮겨 앉자 언론통폐합을 본격 요리하게 된다.
그는 신문사의 최종직급이 차장에 불과했고 특파원을 제외한 외근경험이 전혀 없어 현직언론인을 통해 언론계 내부사정을 정탐해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른 것이다.
칼자루를 쥔 그는 곧 「국풍81」이란 시대착오적인 행사를 추진했다가 우스갯거리가 되었고 민족적 국가주의자를 자처, 자리를 가리지 않고 극우론을 폈다.
한때 「3허시대」를 구가했던 그는 그러나 자기의 울이 되었던 허화평·허삼수씨가 전두환 대통령을 견제하다가 추방된 뒤 전씨 지도력의 영속을 위한 허수아비 후계자옹립계획서를 내고 나서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옮겨 앉아 전대통령의 권력강화를위한 선봉강이 된다.
외교상 아무 실익이 없는 버마를 방문하자고 주장한 것도 그였다. 소위 「네윈」식 섭정을 전씨에게 현장교육시키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민정당내에 4인방이니 6인방이니를 지원해 기회 있을 때마다 노태우 대표위원을 거북하게만들었고 학원 안정법이니, 권인숙양 사건의 「성의 혁명도구화」론, 신민당사 봉쇄 등에 앞장섰다. 이 같은 행각으로 인해 그를 데뷔시켜준 육사17기 친구들과는 연이 끊어졌다.
그러나 노태우 후계체제가 확실해지자 그는 온갖 「끈」 을 동원해 노 후보에게 접근해갔고 그가 자신의 「재주」를 평가해줄 것으로 믿고 13대 민정당공천신청 (고성) 을 냈다가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의 이번 문공위증언은 미국의 「노스」중령과 같은 「부활」을 겨냥한 소영웅주의의 한토막 해프닝으로도 보인다. 그는 그가 옛날 속했던 언론계와 무관했다는 것을 필요이상 강조하고 『노 대통령은 전 대통령의 승계자』로 단정해 언론으로부터의 보신과 민주화에 부담을 느끼는 범여반동세력으로부터의 지원을 노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난세의 처세에 능한 그의 테크닉이 언제까지 통할는지 두고볼 일이다. <이규진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