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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 응원, 따라하라고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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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오~ 필쑹 꼬레아, 오~ 필쑹 꼬레아."

2002년 6월 21일, 일본 시즈오카 월드컵경기장으로 가는 미디어 셔틀버스 안. 한 서양 기자가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안정환의 골든골로 한국이 이탈리아를 무너뜨려 한반도가 한바탕 뒤집힌 날로부터 사흘 뒤였다. 한국-이탈리아전을 보고 일본으로 넘어왔다는 그 기자는 이탈리아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의 엄청난 에너지와 질서 있는 응원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오~필승 코리아'가 담긴 응원가 CD를 샀다"고 했다. 대표팀 서포터스인 '붉은 악마'가 주도하고 온 국민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한국의 길거리 응원은 일본에서도, 외국 기자들 사이에서도 단연 화제였다.

4년이 후딱 흘렀고, 독일 월드컵 개막이 40여 일 앞으로 다가왔다. TV를 켜면 온통 축구요, 월드컵이다. 방송사들은 경쟁적으로 메인 뉴스에 월드컵 관련 소식을 올린다.

광고는 더하다.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워 "저희와 함께 태극전사를 응원해 주세요"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벌써 짜증이 나려고 한다. 순수해야 할 월드컵 응원이 상업성 논란에 휘말리고 있기 때문이다. SK텔레콤과 KTF, 두 라이벌 통신업체가 주도권 싸움을 벌이고 있고, 그 가운데 붉은 악마도 끼여 있다.

SK텔레콤은 2002 한.일 월드컵 때 붉은 악마와 손잡고 '대~한민국' 응원 익히기 광고로 톡톡히 재미를 봤다. 당시 대한축구협회 공식 스폰서는 KTF였지만, SK텔레콤은 절묘한 앰부시(매복) 마케팅으로 '10억원을 들여 4000억원의 효과를 봤다'는 평가를 얻었다. 이번에도 SK텔레콤은 가수 윤도현이 '록 버전 애국가'를 부르는 광고로 치고 나왔다. 그렇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고, 오히려 애국가를 상업적으로 이용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2002년 SK텔레콤에 완패했던 KTF는 설욕을 벼르고 있다. KTF는 영화배우 김수로가 히트시킨 꼭짓점 댄스를 '국민 배우' 안성기에게 시키고, 구보하던 군인들까지 이 춤을 추는 CF를 만들었다. 월드컵 응원을 하려면 꼭짓점 댄스를 춰야 할 것 같은 분위기로 몰고 간다. 이 춤이 젊은이 사이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남녀노소 누구나 선뜻 따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붉은 악마의 행보도 피곤하게 한다. 붉은 악마는 2002년 파트너였던 SK텔레콤과 결별하고 KTF와 스폰서십 계약을 맺었다. 3월에는 '신 응원문화 선포식'을 열었다. 인기 가수들이 출연해 새 창작 응원가 '레즈 고 투게더(Reds Go Together)'를 불렀다. KTF 광고에서는 안성기가 이 노래를 흥얼거리며 꼭짓점 댄스를 춘다. 'Reds Go Together'와 대한축구협회 호랑이 문장이 새겨진 '공식 응원 티셔츠'도 나왔다. 한 벌에 1만9900원이다.

2002년 여름에는 모두가 하나였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지만 모두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길거리에 나와 누구와도 얼싸안고 춤추고 노래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시청 앞 광장으로 가야 할지, 서울월드컵경기장으로 가야 할지, 록 버전 애국가를 불러야 할지, 붉은 악마의 새 응원가를 불러야 할지 헷갈린다. 이꼴 저꼴 보기 싫어 집에서 TV나 보겠다는 사람도 많다. 대한민국을 하나로 묶었던 거대한 에너지원(源) 축구가 어느새 갈기갈기 찢어지는 느낌이다.

응원의 본질은 '자발성'이다. 어설프게 '따라 하라'고 강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흥이 나고 가슴속 불덩어리가 솟아오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뛰쳐나오게 돼 있다.

정영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