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업협상 실패로 판 깨졌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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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쿤 각료회의가 결국 합의에 이르지 못한 채 끝났다. 표면적으론 협상 의제를 둘러싼 이견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농업분야의 협상에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들 간에 불거진 갈등이 결렬의 진짜 이유다.

◇ 속사정은 농업협상=겉으로 드러난 결렬의 이유는 개도국들이 새로운 무역규범인 싱가포르 이슈를 협상 의제에 넣는 데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이번 각료회의가 불발로 끝난 속사정은 농업 분야의 협상 실패 때문이라고 본다.

개도국은 농업협상에서 선진국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제대로 들어주지 않자 판을 뒤엎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이재옥 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싱가포르 이슈는 명분에 불과하며 결렬의 진짜 이유는 농업"이라며 "각료 선언문 초안에 선진국과 농산물 수입국의 의견이 많이 반영된 반면 개도국의 입장은 상대적으로 덜 반영된 것이 주요인"이라고 설명했다.

아프리카.카리브해.태평양 국가 그룹(ACP그룹)의 손익계산도 협상 결렬에 한몫을 했다.

ACP그룹은 대부분 과거 유럽의 식민지여서 유럽과의 농산물 교역에서 일부 품목에 대해 무관세를 적용받았는데 선진국들이 다른 개도국들에 대해서도 일부 품목은 관세를 물리지 않겠다고 하자 크게 반발하고 나선 것으로 전해졌다.

◇ 목소리 커진 개도국들=이번 각료회의의 결렬은 세계무역기구(WTO)의 협상 판도가 크게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종전에는 세계 경제의 양대 축인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막후에서 합의하면 나머지 나라들은 마지못해 따라가는 구도였다.

그러나 이번 회의에선 자기 몫을 요구하는 개발도상국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선진국들의 일방통행식 협상이 더 이상 먹히지 않게 됐다는 뜻이다.

국제구호기구인 옥스팜 관계자는 "세계 무역협상은 다시는 전과 같지 않을 것"이라며 "칸쿤은 그 전환점"이라고 말했다.

◇ 뉴라운드 연기 불가피=황두연 통상교섭본부장은 "뉴라운드(도하개발어젠다.DDA)협상이 이번 각료회의 결렬로 완전히 무산된 것은 아니며 협상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된다"고 말했다.

오는 12월 15일 이전에 1백48개 WTO 회원국 정부의 고위급 인사가 참여하는 일반이사회를 개최해 협상의 지침을 결정하고 예정대로 2004년 말까지 협상을 끝낸다는 일정에는 변함이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같은 협상일정이 계획대로 진행되기는 사실상 어려워졌다. 지난 3월 말 농업 분야의 협상 세부원칙 마련에 실패한 데다 이번에는 협상의 기본 틀마저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는 각국이 농업 분야의 협상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공산품의 관세 인하를 주로 논의했던 우루과이 라운드가 7년 만에 출범한 것과 비교할 때 농업시장의 개방이 핵심인 뉴라운드를 5년 만에 출범시키겠다는 목표가 처음부터 무리였던 셈이다.

내년 11월엔 미국의 대통령선거가 예정돼 있고 파스칼 라미 EU 통상담당 집행위원이 임기를 마치게 된다. 이는 WTO 다자협상을 끌고갈 미국과 EU의 지도력에 공백이 생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역 질서의 공백은 무역국인 우리나라의 입지를 제한하는 요소가 될 전망이다.

칸쿤(멕시코)=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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