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언어 초월한 "공감의 무대" |올림픽연극제 참가 체코·폴란드극단 공연을 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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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최초로 접하는 동구공산권 연극이었기 때문에 선입감과 호기심이 앞선 관극이었다. 그러나 공연이 시작되면서 그러한 것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고 체제와 언어를 초월한 극적 공감을 안겨주었다.
체코의 스보시 극단이 선보인 『충돌』은 교통사고를 당한 택시운전사와 트럭운전사가 법원에 나란히 입원해 점차 회복되어 가는 과정 속에 얽힌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유쾌하게 전개되는 무언극이다. 일상언어가 완전히 배제되고 대신 신음소리·코고는 소리·웃음·재채기 등 본능적인 소리와 마임으로 전개되는 일종의 해프닝이었다.
평범한 주제와 단조롭게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이지만 치밀하게 계산된 연출과 두 연기자의 절묘한 앙상블은 언어의 한계를 뛰어넘고 관객으로 하여금 극 속으로 빠져들게 했다. 그렇다고 이 연극이 단순히 오락만을 추구하는 짓거리는 아니다, 이데올로기나 종족 내지 국가간의 갈등과 화해라는 무거운 주제를 두 연기자의 연기 속에 풀어놓고 관객에게는 건강한 웃음만 안겨준다.
따라서 이 극은 난삽한 웃음이나 유발시키는 무언극과는 달리 격이 있다.
또한 꿈과 현실을 초월하고 화해를 향해 질주하는 환상적인 두 장면을 통해 이 연극이 보여주고자 하는 그들의 보편적 예술철학이 엿보인다.
그러나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그들의 생각을 너무나 일상적이며 편하게 보여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미처 그것을 깨닫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점이다.
체코에 이은 폴란드 가르지니차 극단의 『아바쿰』도 동구연극의 높은 질적 수준을 인식시켜준 무대였다. 극장 안을 들어서면 촛불로 장식된 무대의 밝음과 배우들의 암송소리로 마치 어떤 종교의식에 참가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일종의 제의 극이었다.
구태여「가난한 연극」을 주창한 연출가 「그로토프스키」를 논하지 않더라도 조명·음향 효과 등 모든 무대 기술적 메커니즘을 철저히 잘라내고 오직 배우의 육체만이 연극의 중심을 이룬다는 예술관이 지극히 상식적으로 영향받고 있었음을 이 연극 속에서 쉽게 감지할 수 있다.
따라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인물의 형상화에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느낌을 몸짓이나 행위를 통해 드러내 보여준다. 의식을 행하듯 몰입한 광신적인 연기자들의 모습은 일상적 유희에 젖어 있는 우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주었다. 매우 추상적인 주제를 다룬 이 연극에서 여러 가지 소도구를 통한 표현과 사제의상을 걸친 12명의 연기자들이 펼치는 일사불란한 극의 창출은 주제를 찾아 헤매는 나를 줄곧 어리둥절하게 했다.
「가르지니차」는 민족의 고유 문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실제로 전통 문화속에 살아있는 여러 연극양식을 찾아다니며 수집한 민속 잔재물인 음악·춤·소리·실화 등을 채록하여 무대언어로 원용하는데 노력을 기울여 왔다.『아바쿰』에 숨어 있는 두개의 인물, 즉 엄격한 사제로서의 「아바쿰」과 애증이 있는 범속한 「아바쿰」을 상징적으로 묘사함에 따른 여러 가지 행위와 리, 그리고 인물 서로간의 유기적 조화는 그들의 전통문화 안에서 얻어진 전형이 극 속에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폴란드인들의 삶과 근원적 생명력이 배어 있는 잘 짜여진 이 극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엔 작은 소품 하나까지도 마치 신들린 것처럼 살아 움직여 온통 무대를 신화의 공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주최측의 무성의로 관객들이 35분 동안 덩하니 앉았다가 자리를 일어서게 한 것이다.
아무리 좋은 연극도 관객 속에 무르녹지 못할 때는 한낱 행사 자체에 불과하다. 관념적 주제와 예술 지향적인 연극이었기에 미리 극의 구성이라도 알려주는 배려가 선행되었다면 이 공연의 가치를 더 높여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구 연극의 첫 국내 공연은 이 땅의 연극에 새로운 자극과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이다.

<이강열·연극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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