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는 지금 ⑧ 군부독재의 유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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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960~80년대 ABC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군부독재를 경험한다. 미국의 사주 내지 묵인 아래 쿠데타로 집권한 군인들이 나란히 독재의 칼을 휘둘렀다.

좌익 민주화 인사와 게릴라 탄압 과정에서 고문.납치.처형 등 대규모 인권유린 사태가 발생한 점도 똑같다. 하지만 군부독재가 남긴 유산은 ABC가 서로 다르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장군들은 눈덩이 같은 외채와 현기증 나는 인플레를 남겼지만 칠레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탄탄한 경제 기반을 물려줬다.

브라질의 페르난두 엔리케 카르도주 정권에서 통신장관을 지낸 루이스 카를로스 멘돈사 박사는 "한마디로 포퓰리즘과 신자유주의 개혁 정책의 차이"라고 설명한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군사정권은 인기를 의식해 중도에 포퓰리즘으로 돌아선 반면 칠레의 군사정권은 앞뒤 안 보고 신자유주의 정책을 끝까지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피노체트 집권 기간 중 사망 또는 실종된 사람만 2279명에 달할 정도로 칠레의 군사독재는 혹독했다. 그러나 경제만큼은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민간 엘리트들, 이른바 '시카고 보이스(Chicago Boys)'에게 일임했다. 개방과 자유화를 기조로 한 개혁정책은 근로 조건 악화, 빈부 격차 심화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을 낳았지만 피노체트는 흔들리지 않고 개혁 정책을 지원했다.

민간 정권이라면 하기 힘든 각종 개혁 과제들을 피노체트가 앞장서서 미리 해결해 준 셈이다.

이어 등장한 민간정부들이 신자유주의 경제 노선을 일관성 있게 유지함으로써 칠레는 남미의 다른 나라들과는 대비되는 경제적 성장과 안정을 이룩했다. 반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지금도 포퓰리즘과 신자유주의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개혁 과제와 씨름하고 있다.

차이는 과거사 정리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지난달 24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군부 쿠데타 30주년을 기념하는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군사정권에 가담했던 인사들에 대한 때 늦은 단죄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도심의 '5월 광장'을 뒤덮었다. 아르헨티나의 과거사 정리는 현재진행형이다.

칠레는 다르다. 카를로스 우네우스 칠레 국립대학 교수(국제정치학)는 "군사정권의 피해자인 미첼 바첼레트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칠레의 과거사 정리는 사실상 마무리됐다"고 말했다.

리카르도 라고스 칠레 공보장관은 "우리는 두려움 없이 과거를 보고, 앞으로 전진하는 법을 배웠다"며 "피노체트는 더 이상 칠레에서 의미 있는 화두가 아니다"고 강조했다.

산티아고=배명복 논설위원 겸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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