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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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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외풍을 막아라.』
출범을 앞둔 이일규사법부에 온 국민이 내린 지상명령이다.
5공화국이후 대법원장의 취임사마다 사법권독립문제가 빠지지 않고 거론됐지만 불행히도 사법부는 「권력의 시녀」란 느낌만 점점 깊이 심어줬다. 사법권독립이 처음에는 재야 법조계의 일부에서 거론되는듯 싶더니 이젠 학생·시민은 물론 어린아이들의 입에 오르내릴 정도까지 됐다.
『사법부의 신뢰저하를 가져오게 된것이 법관들 스스로의 노력부족과 아울러지나간 시대의 비정상적인 정치 상황으로부터 비롯된 직·간접적 형태의 여러가지 제약으로부터서도 일부 비롯되었다는것 또한 숨길수 없는 사실이라고 볼때 사법부의 신뢰회복, 나아가 사법권의 독립이라는 문제는 법관 개개인의 문제이자 온 국민의 민주화의지의 실현과도 직결된 문제일수 밖에 없읍니다.』
6.15법관성명에서도 「비정상적인 정치상황으로부터 비롯된 직·간접적 형태의 여러가지 제약」이라고 외풍을 완곡하게 시인하고있다. 『김재규·김대중사건 재판때 당시 청와대에서 재판일정과 양형 (상고기각)을 대법원장에게 직접 「지시」했고 당시 대법원은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이를 지켰던것이 엄연한 사실입니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어떻게 외부로부터 압력을 받은 사실을 스스로 밝힐수 있겠느냐면서도 현재 표류하는 사법부의 가장 큰 원인은 5공화국시절의 어처구니없는 압력과 이를 막지 못하고 받아들인 법관들 스스로의 책임이라고 얼굴을 붉혔다.
이 시절 각종 주요 시국사건은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서울형사법원장-대법원장 라인을 통해 수시 보고되고 통제되는 과정을 겪으면서도 거의 내부의 저항이 없었고 나중에는 「당연시」되기까지 했다는 것. 심지어 어느 대법원장은 형사법원장의 보고에만 만족하지 않고 직접 담당 재판부를 불러 재판진행절차까지 지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야 법조계는 약체 사법부의 원인중 하나로 그동안 대법원이 재조 법관만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대법원판사로 승진하기위해 눈치재판이 불가피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또 대법원장은 무엇보다 대통령의 마음에 들어야 하므로 고분고분해지게 마련이고 서로 눈치를 보아가며 대법원판사들끼리 권력층을 상대로 대법원장이 되기위해 로비를 벌이는 추태까지 있었다는것.
당시 대법원판사를 지냈던 한 변호사는 『대법원은 대법원장의 색깔이 좌우했다』면서 이일규대법원장의 색깔로 보아 지난 어느때보다 강력한 사법부가 될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특히 신임 이대법원장이 전례없이 재조·재야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데다 대법원판사시절의 자세로 보아 2년여의 짧은 임기지만 사법권독립을 위해서는 획기적인 업적을 남길것으로 기대했다.
대한변협회장을 지낸 김은광변호사는 사법권독립을 위해서는 대법관에 신망있는 재야법조인이 많이 영입되어야한다고 지적하고 특히 젊은 대법관보다 경륜이 풍부한 원로변호사를 기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의 한 고위간부는 재야영입의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1∼2명이면 층분하다는 의견. 그는 사법부의 순수성이나 하급 법원의 조직·행정관리면에서 볼때 오랜기간 변호사를 한 사람이 대법관으로 등용되는 것은 오히려 부작용이 더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최근 서울형사법원장등 형사사건 담당 재판부나 법원간부들이 「전과자」처럼 도마위에 오르는것은 잘못된 여론이라며 「어두운시대에 가장 고뇌하고 괴로와했던·법관」들을 이제와서 매도하는 것은 사법부독립을 위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대법원 구성과함께 당면한 과제중 하나인 법관인사에서 과연 5공화국시대의 소위 「정치법관」들이 어떤 대우를 받을지는 주목거리. 법관들 사이에서는 「가장 우수하고 장래성있는」법관들만 골라 법원간부들이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 이용한 셈이라고 안타까와하면서도 자칫 「시대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있다.
이일규신임대법원장은 사법권독립의 가장 으뜸되는 문제로 「법관의 공정한 인사」를 꼽고 법과 양식에따라 판결할수있는 분위기를 만들겠다며 공개인사방침을 밝히고있어 새사법부의 인사회오리는 엄청날 전망.
법관성명사건이후 일손을 놓고 삼삼오오 모여 앉아 사법부의 앞날과 인사문제를 얘기하던 법관들은 이일규대법원장 지명이후 훨씬 표정이 밝아지고 긴장된 모습들.
특히 소장 법관들은 이대법원장의 『짧은 임기지만 적당히 자리나 지키다 나오지는 않겠다』는 말을 자주 입에 올리며 이젠 무엇인가 될것 갈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다. <김우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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