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가게] 서초점 '100인 100색 경매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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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계곡 그림입니다. 겸재의 낙관이 찍혀 있습니다. 5백만원에서 시작합니다."

지난 1일 아름다운 가게(공동대표 박성준.손숙) 서초점 개장 기념으로 열린 '1백인 1백색 경매전'에서 진행자인 탤런트 박상원(44)씨가 작품을 소개하자 경매장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5백만원", "5백10만원", "5백20만원!" 익명의 기증자가 내놓은 겸재의 그림은 열띤 경합 끝에 5백50만원을 부른 朴은자(57.여)씨에게 돌아갔다.

아름다운 가게의 '경매'가 새로운 기부 방식으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명사들이 내놓은 기증품이나 소장 가치가 높은 그림.도자기 등을 구입하면서 덤으로 이웃을 돕는 것이다.

"귀한 물건을 갖고 싶어서", "가진 사람의 사회적 의무(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려고" 등 경매에 참여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모두 밝은 표정이다.

이날 겸재의 그림과 단국대 김혁수 교수의 예술자기를 낙찰받은 朴씨는 "평소 미술품에 관심이 많았는데 수익금을 불우이웃 돕는 데 쓴다고 해 참여했다"며 "좋은 작품들을 감정가보다 싸게 구입해 내가 오히려 이득을 본 게 아닌가 걱정된다"며 웃었다.

李경심(53.여)씨는 고려청자 재현에 평생을 바쳤던 고(故)해강 유근형 선생의 고려청자를 1백10만원에 낙찰받았다. 李씨는 경력 20여년의 아마추어 미술품 수집가.

李씨는 "꼭 갖고 싶었던 해강 선생의 작품을 감정가(2백만원)보다 90만원이나 싸게 구했다"며 "덤으로 불우이웃을 도울 수 있어 기쁨이 두배"라고 말했다.

쌈지스페이스 김홍희 관장이 기증한 백남준 판화는 처음 80만원에서 시작해 2백만원을 부른 장호성(49)씨에게 돌아갔다. 백남준씨의 모교인 경기고 졸업생이라는 장씨는 "경기고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 줄을 서 있는 모습에 '화동의 꽃은 무궁화처럼 질기다'라는 문구가 새겨진 작품"이라며 "모교의 추억이 되살아나 구입했다"고 말했다. 장씨는 판화를 집에 걸어두다가 적당한 시기에 경기고에 기증할 생각이다.

지리산 실상사 주지 도법 스님이 사용하다 내놓은 문경 천한봉 다기 세트는 50만원에서 시작해 1백만원에 50대 사업가에게 낙찰됐다.

이날 서초점 분위기는 삭막한 풍경의 다른 경매장들과는 사뭇 달랐다. 고(故) 김상협 전 국무총리의 부인 김인숙씨가 기증한 한국화가 박세원(전 서울대 미대 학장)선생의 동양화가 유찰되자 모두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잠시 후 진행자 박상원씨가 침묵을 깨고 나섰다. 자신이 작품을 구입한 뒤 현장에서 재기증 의사를 밝히자 박수가 터져나왔다.

평소 미술품에 관심이 많다는 朴씨는 "빼어난 그림인데도 좋은 인연을 맺지 못해 마음이 무거웠다"며 "金전총리의 부인께서 기증한 작품에다 제가 재기증했다는 이야기를 하나 더 얹으면 다음에 좋은 주인이 나타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朴씨는 액자 뒤에 직접 사인을 하고 '언제 차라도 한잔'이라는 글을 써 넣었다.

이날 아름다운 가게가 경매로 올린 수익은 모두 1천2백여만원. 이에 앞서 지난 5월 국회 앞마당에서 열린 벼룩시장에서는 박관용 국회의장이 기증한 도촌 신영복의 동양화, 강용식 국회 사무총장이 기증한 남농 허건의 '쌍솔'등 미술품을 현장에서 경매해 2백60여만원의 수익을 올렸다.

또 지난달 아름다운 가게의 인터넷 쇼핑몰 '생생몰'(www.beautifulstore.org) 오픈 기념으로 마련한 인기 스타들의 기증품과 명품 온라인 경매에선 1백48만원의 수익금이 모였다. 가수 조성모씨가 기증한 청바지는 최고가인 47만원에, 가수 강타씨의 티셔츠는 24만원에 낙찰됐다.

아름다운 가게의 박원순 상임이사는 "중고 물건을 수거하다 보면 간혹 귀한 물건이 눈에 띈다"며 "사회 명사들이 내놓은 물건 가운데 일부는 경매에 부칠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싼 값에 생활용품을 주로 파는 다른 매장들과 달리 서초점은 경매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아름다운 가게 서초점은 매달 첫째.셋째 목요일 테마별로 현장 경매를 열 예정이다. 오는 18일에는 '묵향'을 주제로 한 서화 경매전을, 다음달 중엔 독특한 모양과 사연을 가진 가구 경매전을 열 계획이다.

박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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