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하나의 만다꼬 : 인생에 알로하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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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6호 35면

내 친구 아버지는 딸이 운전하는 차를 처음 탔을 적에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앞차 브레이크등에 불이 들어오면, 너도 항상 브레이크를 밟아라.” 아버지가 딸에게 운전에 대해서 들려준 첫 조언. 안전을 염려하는 깊은 마음이 스며 있다.

반면 우리 아버지가 내가 운전하는 차를 처음 탔을 때는 이랬다. 사거리의 신호등이 파란불에서 노란불로 바뀌어 내가 차를 세우려고 하자 아버지는 다급하게 외쳤다. “노란불일 때는 밟아래이!!”

부산 출신에 다혈질인 아버지가 의미한 것은 물론 엑셀이었다. 그래서 졸지에 ‘아버지가 딸에게 운전에 대해 들려준 첫 조언’은 ‘노란불일 때는 밟아래이’가 되고 말았다.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한 번은 아버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모 대학교에 간 적이 있다. 아버지는 그곳 교수였다. 그 학교는 지대가 높아서 제법 경사진 산비탈을 따라 캠퍼스가 자리했다. 학생들이 저 앞에서 길을 건너자 나의 다혈질 아버지가 언성을 높였다. “저 녀석들은 차가 가는데 조심도 안 하고 말이야!”

캠퍼스 안은 수 많은 학생이 걸어서 이리저리 이동하는 곳이므로 거기에 차를 부웅 몰고 올라가는 아버지가 미안히 여기고 조심하는 게 당연해 보였다. 심지어 그 학생들이 건넌 곳은 횡단보도였다고!

나는 부끄러웠다. 나의 아버지는 종종 부끄러움을 몸소 행하여 나에게 부끄러움을 가르쳐 온 은사님이다.

얼마 전 하와이에 다녀왔다. 부드러운 바람, 반짝이는 바다, 무성하고 활기 넘치는 식물들, 어딜 가든 들려오는 낙천적인 음악 소리…. 그야말로 마음이 편안하고 느긋해지는 2주였다. 운전을 해보니 한국과는 확연히 다른 그곳의 속도를 더욱 체감할 수 있었다. 누구도 과속하지 않았고, 깜빡이를 켜면 누구나 양보해주었다. 타국인데도 운전하는 게 하나도 어렵지 않았다.

보행자의 입장에서도 참 달랐다. 길을 건너려는 제스처만 보여도 차들은 일제히 멈춰섰다. 그곳이 횡단보도이건 아니건 간에. 모두가 느긋이 건너고 느긋이 기다렸다. 우리나라에선 어릴 적부터 ‘차 조심!’은 배우지만 운전자가 보행자를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는 건 배우지 않는다. 대학교수조차도.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사람과 차가 부딪치면 다치는 건 사람이니 차가 사람을 보호하는 게 당연한데 말이다. 우리나라에선 빠른 것이 선(善)이므로 느린 사람이 빠른 차에게 양보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 편이 전체적인 교통의 흐름을 더 빠르게 할 테니까. 와이키키에서 만난 서핑 강사는 한국말을 좀 할 줄 안다며 “빨리빨리!”라고 말했다. 파도를 기다리는 하와이의 서퍼에겐 참 안 어울리는 말이었다.

꿈 같은 2주를 보내고 한국에 돌아와 운전을 했더니 역시나 피곤하다. 차선을 바꾸려고 깜빡이를 켜면 옆 차선 차량이 ‘어딜 내 앞으로!’라며 부웅 나를 막아선다. 제한속도를 지키며 달렸더니 뒷 차가 헤드라이트를 번쩍이며 ‘빨리빨리’라는 모스부호를 보낸다. 다들 맹렬히 달리고 있다. 아랑곳하지 않기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서울에서 하와이의 속도로 달리려고 노력하는 동안 참 신기하게도 뒷차는 안달이 나는데 나는 점점 마음이 편안해졌다. 여행 중에 산 예쁜 티셔츠에는 ‘알로하라이즈(Aloharize) 유어 라이프’ 라고 적혀 있었다. 인생을 알로하 하세요.

앞으로도 나는 천천히 내 삶을 ‘알로하라이즈’해볼 참이다.

브랜드라이터. 예스24 팟캐스트 ‘책읽아웃’ 진행자. 『힘 빼기의 기술』을 쓴 뒤 수필가로도 불린다. 고양이 넷, 사람 하나와 함께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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