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유망업종을 잡아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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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유망업종을 갈구하는「끝없는 변신」은 우리 재계의 숙명일는지도 모른다.
문어발식 기업확장이니, 뭐니 하며 별의별 따가운 시선에도 아랑곳 없이 변신과 전환을 거듭해온 것이 우리재계다.
「시대에 맞춰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수 없다」는 살벌한 명제는 이젠 상식에 지나지 않는다. 변신에 게을렀던 수많은 유수기업의 명멸이 이를 단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유망업종으로의 진출은 혈전도 불사한다. 이의 성패는 곧 기업 자신의 생사를 좌우하기 때문이다.
지난 얘기지만 삼성이 사돈간 기업인 럭키금성의 끈질긴 반대를 무릅쓰고 전자업종에 진출한 것이나「007작전」끝에 유공을 인수한 선경스토리등은 이제 고전에 속하는 변신 사례들로 치부된다.
만약 그렇지 못했을 경우 삼성과 선경의 지금 모습을 상상해보면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물론 변신 그 자체가 기업을 먹여살리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성공해야 한다.
어설프게 변신을 시도하다가 망친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왕년의 거포 화신은 비스코스로 제조업에 진출했다가 큰 코를 다쳤고 뒤이어 유행따라 전자업계에 뛰어들었다가 결국 치명타를 얻어맞고 쓰러졌다. 금호 역시 전자 진출을 시도하다가 뿌리째 흔들렸던 쓰라린 경험을 갖고 있다.
80년대에 들어오면서 지목되어 온 유망업종은 자동차및 전자부문의 부품산업을 비롯해 컴퓨터·반도체·항공기등의 첨단산업, 레저산업, 석유화학산업, 생명공학산업등이다.
특히 우주항공분야같은 미래산업을 놓고 삼성·대우·한진등 우리나라 선두그룹 재벌들이 벌이는 경쟁은 앞으로 귀추가 주목되는 신분야진출의 모델 케이스로 꼽힌다.
기업마다 전담팀을 만드는게 유행이고 새로운 업종을 추가시키기 위해 정관변경 작업을 벌이는가하면 아예 회사 이름까지 바꿔버리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최근들어 가장 두드러진 변신 움직임은 이른바 사양산업의 낙인이 찍힌 섬유회사들에서 찾아진다. 섬유재벌 코오롱은 금년 1월말 미GE와 합작으로 코오롱전자를 설립, 전자제품의 소재산업인 PCB원판제조사업에 착수했다.
섬유부문의 한계를 솔직이 자인하고 오는 91년에 가서는 목표매출액 1조원중에서 비섬유부문의 비중을 55%까지 끌어올리겠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이를 위해 금년중의 투자계획만도 1천5백억원에 달한다.
삼성그룹의 원조기업인 제일 모직 역시 최근 탈섬유를 선언하고 나섰다. 91년까지 2천억원을 투입해 그룹내 타사와는 별도의 석유화학사업을 새로 개척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금년 1단계로 1천2백억원을 들여 여천에 엔지니어링 플래스틱 제조사업에 착수하고 이를 토대로 2000년대에 가서는 비섬유 비중을 70%이상 수준으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한일합섬은 아예 자체계획의 여지도 없이 정부의 부실기업 떠맡기기에 말려 어느날 갑자기 신발·레저·무역부문으로까지 변신할 수밖에 없었다.
선경합섬의 경우 유공 인수의 성공뿐만 아니라 일찌감치 꾸준한 연구개발투자에 힘입어 착실한 변신을 거듭해 왔고 최근 들어서는 산업용 섬유를 비롯해 의약업·자동차 내장재 생산에까지 진출할 계획이다.
효성그룹의 동양나일론은 이름만 나일론 회사지 일찌기 컴퓨터산업 폭으로 변신을 시도해 상당한 기반을 구축해 놓고 있다.
이처럼 최근의 변신은 그룹차원에서 새 회사를 차려 신규 유망업종에 진출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계열 회사별로 스스로의 유망분야를 찾아내 부딪쳐 나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부실기업으로 괄시를 받아온 해외건설업체들 역시 살아남기 위한 변신의 노력이 완연하다. 대표적인 현상이 새 사업을 벌이기 위한 정관 개정작업. 코오롱건설은 최근 레저·스포츠및 위락시설사업과 정보처리 용역사업을 새 정관에 추가했고 럭키개발은 소방설비업등을, 한일개발은 골프장·주류판매업등을 각각 집어넣었다.
동부그룹의 미륭건설은 최근 인수에 성공한 영남화학에 25%지분 참여로 석유화학사업 진출을 도모하고 있으며 가스시설 시공사업도 계획하고 있다.
한덕개발은 최근 서울랜드의 완공으로 레저산업 쪽에서 새 강자로 부상했고 삼부토건은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을 지어 호텔업에 진출했다.
삼환기업 역시 호텔진출 계획을 세워놓고 합작파트너를 물색중이다.
극동건설은 지난 86년 동서증권을 도산한 국제그룹으로부터 인수함으로써 하루아침에 최고의 성장산업인 증권업계의 안방차지에 성공했고 그밖에 레저·유통업쪽에도 눈을 돌리고 있다. 또한 보험시장 자유화를 계기로 미국 생보사와의 합작도 추진중이다.
신성은 87년 경영 다각화의 일환으로 전자·자동차등의 기초소재로 쓰이는 고품질 혹연을 생산하는 고려흑연을 설립했다.
대림산업의 경우 더욱 분명하다. 한때 우리 건설업계의 안방차지를 했던 대림은 자신의 부실로 휘청거리던 위기를 간신히 넘기고 이젠 왕년의 골칫거리였던 호남에틸렌이 효자노릇을 하고 있다.
주력업종 자체가 해외건설에서 석유화학으로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캐나다와 합작으로 화학펄프사업에도 진출을 계획하고 있다.
식료품회사들도 그전의 모습은 아니다. 미원의 경우 조미료에서 벗어나 최근 미 바이요메카사와 합작으로 자본금 5백만달러규모 (미원지분51%)의 의약품 제조회사를 설립, 진단시약을 생산해낼 계획이다. 또한 FRP (강화유리섬유) 의 원료인 불포화 폴리에스터수지를 생산하고 있다.
제일제당은 오래전부터 유전공학분야에 대한 연구개발투자를 시작, 탈식품회사 작전을 전개해 왔다. 기존 조미료사업분야에서는 중공쪽으로 현지공장설립을 위해 문을 두드리고 있다. 조만간 본격적인 첨단의약제품 제조회사로 변신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진로는 최근 국내 최대 도매단지인 진로유통센터를 설립한데 이어 화물터미널·버스터미널등을 차례로 인수해 술회사의 종래 이미지를 단숨에 벗어던졌다.
이처럼 기업의 변신은 부실업종·사양업종에서뿐만 아니라 최고의 안정성을 자랑한다는 먹는 산업에서까지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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