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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와 정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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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통계(statistics)의 어원은 라틴어 '통치자 또는 정치가(statista)'에 뿌리를 두고 있다. 통치자들은 로마시대부터 그럴듯한 통계로 대중을 지배한 모양이다. "거짓말에는 세 종류가 있다. 그냥 거짓말과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 영국 정치가 벤저민 디즈레일리의 말이다. 국내외 신문들이 즐겨 인용하는 윈스턴 처칠의 어록도 있다. "나는 내가 조작한 통계만 믿는다." 과연 통계는 정치가의 숫자놀음에 불과한 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처칠은 통계부라는 별도 조직부터 만들었다. 전황을 사실대로 보고받고,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공개했다. 처칠은 자신의 불 같은 성질을 잘 알았다. 비위를 맞추기 위해 밑에서 듣기 좋은 승전보만 골라 올리는 것을 경계했다. 통계부가 공개한 영국군의 연전연패 소식은 영국인을 단결시켰다. 처칠은 연설할 때도 자주 통계를 끼워 넣었다. 신뢰를 얻기 위해서다. 중대 결심 때마다 주변 통계학자들의 조언에 귀를 기울였다.

결론적으로, "내가 조작한 통계만 믿는다"는 처칠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독일 나치스의 선전 귀재인 요제프 괴벨스가 만든 창작품이다. 그는 처칠과 국민의 신뢰를 끊고자 했다. 그래서 지어낸 거짓말이다. 괴벨스는 처칠이 직접 이런 말을 했다고 떠들고 다녔다. 1940년에는 독일 언론에 '처칠의 발언처럼 쓰도록' 보도지침까지 내려보냈다. <상식의 오류사전 3, 발터 크래머 저>

요즘 수없이 쏟아지는 통계를 곧이곧대로 믿다간 바보되기 십상이다. 불신이 깊다. 청와대 통계조차 믿기 어렵다. "강남학생들이 서울대를 휩쓴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곧바로 서울대의 불만을 샀다. 지난해 "서울대의 60%가 강남학생"이라는 발언의 재판(再版)이다. "어떤 통계냐"는 반문에, "재외국민 특별전형 합격자 53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궁색한 변명을 내놓았다. 청와대가 이러니 행자부.국세청도 코드 맞추느라 설익은 통계로 망신을 자초했다.

이 정권만큼 통계를 중시하는 정부도 없다. '통계강국'을 내걸고 통계청을 차관급으로 승격시켰다. 국가통계위원회를 세워 통계품질을 관리하겠다는 통계법 개정안도 나왔다. "통계는 미래를 준비하는 기초" "정책의 신뢰성은 통계에서 나온다"…. 슬로건이야 좋다. 통계는 양날의 칼이다. 신뢰를 부르기도, 불신을 자초하기도 한다. 통계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게 좋다. 듣는 사람 헷갈리게 하는 정치가의 엉터리 통계는 지겹다. 지금이 어디 로마시대인가.

이철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