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성공회 주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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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본디오 빌라도 때에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으심을 믿으며…』
이것은 소위 나를 비롯한 예수쟁이들이 고백하는 신앙내용 중 가장 핵심인 사도신경의 부분이다. 이 부활이라는 엄청난 예표는 오늘날 세계 곳곳에 교회공동체가 존재케 하는 근원이 되고 있다.「죽은 사람이 다시 살았다」는 이 선언은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으면 그야말로 미친 사람의 헛소리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 비상식적이고 비과학적인 사실이 무려 2천년동안이나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오늘날도 끊임없이 전파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신앙이나 신념을 과소 평가하려 함도 아니오, 기독신앙의 우위성을 증거 하려함은 더더욱 아니다. 기독신앙 인으로서의 부활이 전 인생에 있어 상당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매 부활절(4월 3일)에 즈음하여 한 번쯤 같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예수라는 한 청년의 죽음과 부활은 단순히 종교적 사건으로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다.
예수가 처형된 이유는 대체로 크게 두 가지로 보인다.
하나는 당시 종교체제를 부인했다해서 신성모독 죄로 고발당하고, 또 하나는 그가 죽어야 체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당시 종교는 그를 반역·모반죄로 하여 정치적 죄인으로 십자가형을 당하게 한다. 이렇듯 예수의 죽음은 단순한 종교적 행태를 넘어서 사회적·정치적인 지평을 간과할 수 없게 되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개인의 삶이 결코 개인에게 묶일 수 없고, 정황에 따라 순식간에 그 가치가 전도될 가능성이 많은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시대의 흐름은 곧 자신의 운명을 가늠해준다는 사실을 피부로 느낀다.
최근 신문에 보도된 바대로 왕에 버금가는 권세를 누리던 자가 어느 날 갑자기 뺨을 맞고 한마디 대꾸도 못하는 신세로 전락한다는 것은 단순한 개인의 잘잘못을 넘어 일종의 사회현상, 또는 정치현상과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인정하게 한다.
이렇듯 사회의 모든 구성요소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유기체적 관계를 벗어날 수 없다. 시대의 정신이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개인의 삶은 물론 역사의 흥망성쇠를 가늠케 하는 것이리라 믿는다.
이런 의미에서 한 시대의 종교적 역할은 각 분야에 있어 도덕적 지도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있다고 본다. 그런데 2천년 전 예수시대 이후부터 지금까지 종교집단은 오히려 도덕적 모범을 보이기보다는 체제를 고수하고 기득권을 확보하는데 급급하여 정치체제와 담합은 물론 민중을 수탈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예수는 죽기까지 자신의 모습과 압제 당하는 백성들을 하나로 하시면서 그 어떤 영광을 원치 아니하셨으나 그를 따르는 집단은 오히려 이를 빌미로 그 반대급부를 무리하게 요청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간에 민주화 투쟁에 있어서도 수많은 재야세력이니 기독교 인권운동은 결국 선량이 되려고 한다든지, 어느 세력의 지분을 할당받기를 원하는 것 같아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실망케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의 행진은 결코 멈추어지지 않는다. 진리를 사랑하는 뭇 백성들은 아무 보상 없이 자신을 바쳐 이 세상의 빛으로서의 역할,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결코 예수의 죽음을 잊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부활한 예수의 모습을 보면서 세상의 모든 아픔을 자기의 것으로 하여 스스로를 채찍질하면서 미래를 위한 꿈, 새로운 생명을 위한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이것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가져다주는 교훈이다.
참으로 안타깝게도 우리는 지금까지 통치자에게, 또는 지도자라는 사람에게 화살을 돌렸지 그들을 내버려둔 책임으로 자신의 가슴을 치지 못했다. 그 이유가 어찌되었든 우리는 정의니, 평화니, 진리니 하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면서 이를 위해 어떠한 노력도 꾸준하게 해본 적이 없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우리에게는 절망이 드리워지고 자포자기의 또 하나 결과인 쾌락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다.
지금부터 약 80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새로운 방법으로 악의 세력과 맞서 싸운 적이 있다. 을사보호조약 이후 일본의 경제침략이 노골화되고 전혀 상환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차관을 비롯해, 인생을 좀먹는 술·담배 등을 무작정 수입하여 민생에 결정적 타격을 입게되었을 때 국채보상운동, 물산장려운동, 절약·절제운동 등 민간이 주도하여 국민에게 새로운 역사 의식을 고취한바 있다.
이런 국민운동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 흐름을 바로잡기 위한 국민적 합의가 모든 더러움을 우리 손으로 청산하라고 하는 사랑의 마음에 있음이다.
거의 비슷한 시기애 인도의「간디」는「샤티하그라하」운동이라 하여 비폭력·불복종으로 시작하여「스와라지니」즉 자치운동에 이르기까지 누구의 탓으로 돌리기보다는「우선 나부터」라는 적극적인 운동을 벌인 적이 있다.
물론 우리는 우리 스스로 참으로 약하다는 것을 안다. 권력으로 누르면 찌그러 들고, 돈으로 누르면 슬그머니 도망가는 그런 필부에 지나지 않음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속 깊이 용솟음치는 진리를 희구하는 열정은 숨길 수 없음도 잘 알고 있다. 백성은 이제 어리석지 않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무엇이 죽어야 하고 무엇이 다시 살아나야 하는지 너무나도 갈 안다.
이제는「내가 노력해봐야」하는 자조보다는「나만이라도」라는 옹골찬 용기를 가질 때가 된 성싶다. 바로 그런 사람에게만 봄이 온다. 바로 그런 사람에게만 부활의 기쁨이 오며, 바로 그런 사람에게만 인생의 깊은 맛을 깨닫게 해줄 것이다.
어둠이 깊게 드리울수록 새벽이 가깝다는 뜻이요, 그 새벽을 맞기 위해서는 깨어있어야 하듯이 더 이상 이 어둠의 늪에 스스로를 빠뜨리지 말고 서로 서로를 일깨워 부둥켜안고 새날이 올 때까지 불을 밝히자.【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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