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스트셀러 중고생이 만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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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토요일인 10일 오후4시. 광화문4거리 교보문고 지하매장. 각 코너마다 빽빽이 책이 꽂혀있으나 책 못지않게 빽빽이 들어차있는 것은 사람들이다.
그중 대부분이 10대.
토요일이라 일찍 수업을 마치고 서점에 진출한 중·고생들 사이를 비집고 통로를 걷는 일은 짜증스러울 정도로 힘들다.
친구들과 함께 책을 사러 나온 배화여고 2년 안준희양(17)은 이날 7천1백50원을 썼다.
교과서 1권과 소설책 3권인데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리처드·바크」의 『갈매기의 꿈』등을 샀다.
『선물할 거예요. 나는 다읽었어요. 책값요? 책산다고 하면 어머니께서 아무 말씀않고 돈을 주시거든요』
제 1매장 통로에 설치된 전광판에는 교보문고가 매주 집계하는 베스트셀러 목록들이 잇달아 새겨지고있다.
『거의 다 읽은 것들이에요. 「홀로서기」「나의 라임오렌지나무」「꼬마철학자」,이런 책들은 친구들이 거의 다 갖고 있어요』
자신을 은평중학교 3학년생이라고 밝힌 곽태훈군(14)은 어렵지 않으냐는 질문에 『재미었잖아요?』라고 반문한다.
문학서적 코너 한쪽에는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책을 읽고있는 학생들 때문에 지나갈수 조차 없다.
신정여중 3학년 장미순양(15)은 오탁번씨의 시집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를 펼쳐놓고 미니수첩에 깨알같은 글씨로 싯귀를 옮겨적고 있다.
『이해가 안가는 부분도 있지만 시 외우기가 즐거워요』
서점측에 따르면 교보문고의 하루통과 인원은 3만명(평일)∼4만명 (토·일요일)에 달하는데 이중절반이 10대.
영업부 곽상하 부장은 말한다.
『베스트셀러는 10대들이 만듭니다. 부모들이 책을 사준다는 것은 옛말입니다. 도서선택권과 구입능력 모두를 10대 스스로 갖고있거든요』
지난해 종로서적과 교보문고의 연간 베스트셀러 상위권을 차지한 책들은 대다수가 10대들에 의해 결정되었다.
전편·속편 합쳐 1백만부 이상이 팔린 서정윤씨의 시집 『홀로서기』를 비롯, 10대용 소설 『나의 라임오렌지나무』『광란자』『꼬마철학자』『크눌프』『비밀일기』등의 책들을 학생들의 책가방속에서 발견하는일은 그리 어렵지않다.
이같는 「10대시장」의 일반화와 이들의 수요를 따라가는「산대산업」속에 출판이 동참하게된 현상은 초년대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었다.
일례로 10년전인 79년의 베스트셀러를 살펴보면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공』(조세희) 『갈수없는 나라』(조해일) 『내일은 비』(김지총) 『바구니에 가득찬 행복』(임국희편) 『사랑을 위하여』(고은) 등 모두가 성인독자들을 겨냥한 책들이었다.
이해인 수녀와 김초혜시인의 시들을 좋아한다는 금옥여고 2년 황선아양(17)은 『우리반엔 시 쓰는 친구들이 20명 가량이 돼요. 소설 쓰는 친구들도 많구요』라며 시집 『홀로서기』는 멋있는 귀절들은 많으나 시인의 진술이 다소 주관적이라고 그럴듯한 평까지 내린다.
그러나 서점에서 만난 10대들 대부분은 말한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들은 너무 어렵고 이해가 안돼 몇장 넘겨보다가 책읽기를 포기한다는 것이다.
『예전엔 책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경험」을 의미했지요. 그러나 이젠 TV등이 모든 경험을 다 시켜주지요.TV보다 재미없고TV보다 어러운 책은 안읽어요. 책과 자신이 싸우면서 얻게되는 은밀한 기쁨들을 요즘 풍요로운 10대들이 이해할까요?』30대증반의 회사원 이계배시는 10대들 사이를 뚫고 나가며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기형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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