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열며

희화화되는 공권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들에겐 꿈이 있다. '무궁화 꽃'을 다는 것이다. 계급장으로 무궁화 꽃 하나는 경위다.

경위는 간부에 속한다. 예전에 파출소장이다. 8만여 명의 하위직 경찰관(순경.경사.경장) 가운데 80% 이상이 '꽃'을 피워보지 못한 채 퇴직한다.

최근의 경찰공무원법 개정 논란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경위로 자동 승진토록 하고, 그 승진연한을 줄여 달라는 게 핵심이다. 경찰의 업무 특성을 감안하면 이들의 목소리를 경청할 만하다.

그들은 박봉과 격무에 시달린다. '짭새' '순사'란 용어 속에 풍기듯 사회적 시각은 아직도 냉랭하다. 공권력에 권위를 부여하려면 그에 걸맞은 지위와 대우를 해줄 필요가 있다고 본다.

경찰의 또 다른 현안은 수사권 조정 문제다. 검찰이 독점해온 수사권 중 일부를 떼달라는 주장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얼마 전까지 반백의 50대 경찰관이 20대 검사를 '영감님'으로 받들며 수사지휘를 받아야 했다. 수사 경험이 일천한 '백면서생'이 노련한 경찰 수사관을 '지휘'하는 수모를 참아야 한다. 검찰과 경찰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제 경찰에는 경찰대학을 비롯해 4년제 대학 출신 경찰이 크게 늘고 있다. 자질도 향상됐다. 교통사고나 절도 등의 단순 사건은 경찰이 사실상 수사해 왔다. 비리와 부패 등 부작용이 걱정되지만 '경찰 수사권'에 대해 국민은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그만큼 사회 분위기는 경찰에 우호적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의 요즘 행태는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불안감을 던져준다. 자동 승진 규정을 고친다고 대통령을 상대로 헌법소원을 낸다. 상명하복의 명령체계가 엄해야 할 경찰이 통치권자에게 대드는 형국이다. 간부들이 수사권 독립을 외칠 때 하위직 경찰관들은 이에 반대한다는 성명서를 낸다. 지휘부의 방침에 도전해도 달래기에 급급한 것이 요즘 경찰의 모습이다.

상과 하의 영(令)이 서지 않는 공권력은 국민에게도 권위가 서지 않는다. 공권력이 희화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일들이 시대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 권위주의 정권 시절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던 업보를 깨려는 시도일 수 있다. 엘리트들이 속속 합류하고 직업 경찰에 대한 자부심이 높아지면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도 바람직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단계와 순서가 있게 마련이다. 국민에게 경찰의 부정적인 이미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 영화 '투캅스' 같은 비리 경찰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치안은 여전히 불안하다. 엊그제 50대 남성이 11세짜리 여자 어린이를 성폭행한 뒤 죽이고 불태워 버리는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경찰은 수사권 조정이나 근속 승진 문제밖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각종 범죄를 막겠다고 노력하는 흔적이 없다. 그들만을 위한 밥그릇 싸움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 공권력에 누가 권위를 주고 따르겠는가.

커뮤니케이션 이론 중 '상호성의 법칙'이란 게 있다. 내가 상대방에게 선심을 쓰면, 상대방도 언젠가는 나에게 보답할 것이라고 믿게 된다는 것이다('설득의 심리학', 로버트 치알디니). 경찰은 사회가 어지러울수록 절도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권위와 보상이 따른다. 경찰이 국민의 안전을 위해 고심할 때 국민은 지지와 믿음으로 보답할 것이다. 상호성의 법칙에 따라서 말이다.

고대훈 사건사회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