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스마트폰 FM 기능, 애플은 안 넣고 삼성·LG만 넣을 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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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지난달 29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A4 3장 분량의 보도자료를 뿌렸다.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내년부터 스마트폰 신제품에 FM 라디오를 자율 탑재한다는 내용이다. 기업의 자율적 결정 내용을 왜 정부가 발표한 걸까. 보도자료에는 난색을 보여온 기업을 정부가 어떻게 설득했는지 그 과정이 상세히 나와 있다. 사실상 ‘정부가 기업을 설득해 스마트폰에 라디오를 탑재하도록 했다’는 게 이 보도자료의 요지였다.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여전히 떨떠름하다. 정부는 ‘자율’을 강조하지만, 제조사들은 사실상 ‘의무화’로 받아들이고 있어서다.

과기정통부선 ‘기업 자율’이라지만 #국내 업체는 무시 못해 ‘의무’ 인식 #애플은 정부 요청 받고 단칼에 거절 #한국 업체만 추가 비용 부담 불가피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스마트폰에 FM 라디오를 탑재하자는 목소리는 지난해 9월에 터진 경주 지진 사태부터 증폭됐다. 당시 경주 일대에선 이동통신 전송량이 폭주하면서 전화는 물론 카카오톡마저 두절되는 등 일대 혼란이 발생했다. 라디오를 탑재하면 이런 상황에서도 전파로 수신되는 재난 방송을 청취할 수 있어 국민의 재난 대응력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 정부의 주장이다. 지난해 10월에는 스마트폰 라디오 탑재를 의무화하자는 법안이 국회에서 발의된 것도 정부로선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각에선 스마트폰 제조사들은 기존 제품에 라디오 기능을 탑재했음에도 데이터 수익을 노린 이동통신사와의 이해관계로 이 기능을 막아놨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물론 기존 국산 스마트폰에 라디오 수신 기능이 있는 건 맞다. 그러나 이 기능을 활성화하려면 간단히 설정만 바꿔서 해결되는 게 아니라 제품 설계를 다시 해야 한다는 게 제조사들의 설명이다. 원가 상승으로 국내 스마트폰 제조사들이 손실을 볼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익명을 요구한 제조사 관계자는 “스마트폰의 두뇌 구실을 하는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에는 라디오 기능이 내장돼 있지만, 이 기능을 쓰려면 증폭장치 역할을 하는 반도체 부품을 추가해야 한다”며 “이렇게 되면 부품 위치를 다시 설계하고 생산라인도 다시 짜게 되면서 원가가 더 들게 된다”고 설명했다.

정부도 스마트폰 제조사의 원가 부담이 늘어난다는 점을 모르진 않는다. 이영균 과기정통부 사무관은 “제조사로부터 의견을 물어보니 스마트폰 1대당 1달러 이내에서 손실이 발생한다고 들었다”며 “지금 가격에서 1달러도 안 되는 비용이 더 든다고 해서 어마어마한 손실이 날 정도는 아닐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제조사들이 체감하는 원가 ‘1달러’의 가치는 달랐다. 한국 시장에선 연간 2200만대 수준의 스마트폰이 판매되고 이중 삼성·LG전자 제품은 1760만대가량 되므로 1대당 1달러씩 계산하면 1760만 달러(200억원)의 손실이 발생한다. 특히 LG전자는 최근 2년 동안 스마트폰사업부(MC 사업부)가 적자를 겪고 있어 적자 폭 확대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같은 손실 부담을 삼성·LG전자 등 국내 제조사만 지게 되는 점이다. 애플은 차기 아이폰 신제품에 FM 라디오 기능을 탑재해 달라는 과기정통부의 요청에 “회사 방침상 라디오 탑재는 없다”고 딱 잘라 거절했다. 결국 한국 스마트폰 기업만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내년도 라디오 탑재를 약속하는 형국이다.

FM 라디오가 재난 상황에서 실효성이 있을지도 의문이란 주장도 있다. 2015년 방송통신위원회가 전국 도로·철도터널·지하철·지하공간 등 3026곳을 전수 조사한 결과 재난방송 주관 방송사 KBS 기준 방송 수신 불량 지역이 FM 라디오 2650개소(87.5%), 지상파 DMB 2528개소(83.5%)로 나타났다.

IT 전문가인 박용후 피와이에이치 대표는 “FM 라디오를 탑재해도 여전히 재난방송 청취 불량 지역이 90%에 육박하는 데도 스마트폰 라디오 탑재를 고집하는 것은 결국 청취율이 떨어지는 방송사를 돕는 정책일 뿐”이라며 “FM 라디오도 안테나 역할을 하는 이어폰을 소지해야 전파를 수신할 수 있어 실제 활용 가치가 있을지도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소비자 단체들은 일단 환영한다는 표정이다. 다만, 재난 상황에 충분히 활용될 수 있도록 FM 라디오 인프라 확대가 병행돼야 한다는 의견이다. 윤문용 녹색소비자연대 정책국장은 “데이터 비용이 따로 들지 않는 지상파 라디오는 저가형 요금제를 즐겨쓰는 노년층 소비자에겐 유용할 것”이라며 “재난 상황에서도 실제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청취 불가능 지역에 전파 중계기 설치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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