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 세액공제 줄여 세수 확충…국가 경쟁력 핵심을 복지 정책으로 접근해선 안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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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대기업의 연구개발(R&D) 투자가 줄어드는 가운데, 정부마저 세제 혜택을 축소하자 업계와 산업 전문가들의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R&D 투자는 미래 먹거리와 일자리 확대를 위해 필수적이지만, 당장의 영업 실적엔 부담이 된다. 세제 혜택을 통한 정부의 '넛지 효과(작은 자극으로 큰 변화를 끌어내는 효과)'가 소극적일수록 R&D 투자는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다. 당장 한국산업기술진흥협회가 최근 1159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이번 세제개편 이후 10곳 중 8곳이 넘는(85.7%) 기업이 R&D 투자와 연구원 신규 채용을 줄일 것이라고 답변했다.

산업기술진흥협회 "세제개편 이후 기업 85.7% R&D·연구원 채용 줄이겠다고 답변" #R&D 투자 늘리라는 정부…대기업들 "더 늘릴 여지 없는데 현실 외면" 비판 #"정부가 R&D 예산 직접 집행하기보다 민간에 맡겨야 사회적 효용 늘어"

대기업들이 이번 세제개편안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핵심에는 일반 R&D(신성장 동력과 원천 기술을 제외한 전체 R&D) 투자금 전액에 적용되는 세액 공제 비율을 기존 1~3%에서 1%포인트 줄인 데 있다. 대기업은 일반 R&D 투자금의 경우 한 해 동안 투자한 전체 금액과 전년 대비 증가분 중 한 가지 기준을 골라 세액 공제를 받을 수 있다. 증가분 기준을 선택하면 공제 비율은 30%에 이르지만, 대기업들은 이보다 공제 비율이 낮은 전체 투자금액 기준을 택해왔다. 공제 비율이 높은 건 장점이지만 경기전망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R&D 투자를 늘릴 여지가 적어 공제받을 증가분 자체가 미미했던 탓이다.

세제 당국은 대기업의 R&D 투자 확대를 유도하기 위해 증가분 기준 공제 비율 30%는 그대로 유지하고, 전체 투자금액 기준 공제 비율만 축소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업계에선 이 같은 정부의 태도는 기업의 R&D 현실을 무시한 채 정책적 목표 달성만 강조하는 전형적인 '관료 편의주의식' 사고라고 비판한다.

막 사업을 키우기 시작한 중소기업은 매년 2~3배씩 R&D 비용을 늘리게 돼 증가분 기준으로 세액 공제를 받는 게 유리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체계적인 R&D 시스템을 갖춘 대기업은 매년 비슷한 R&D 비용을 투자하게 돼 증가액이 클 수가 없다.
이경근 법무법인 율촌 조세자문부문장(세무사)는 "이미 유럽에서 2014년 진행된 실증 연구에선 증가분 기준 세제혜택이 R&D 투자를 늘릴 것이란 믿음은 근거가 없다고 결론 내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산업 전문가들이 우려하는 점은 기업의 R&D 관련 세제 정책을 마치 사회적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한 복지 정책처럼 접근하는 데 있다. 최저임금 인상, 아동수당·기초연금 증액 등 새 정부가 제시한 각종 복지 정책을 이행하려면 국민 전반의 세율을 높여야 한다. 하지만 여론 부담을 의식해 대기업의 R&D 지원을 줄여 부족한 세수를 확보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수가 필요한 관료들이 한 해 38조9300억원(2015년 기준)에 달하는 대기업 연구개발비 관련 세액 공제를 줄이는 '쉬운 선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태규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증세없는 복지'를 못박은 박근혜 정부에서도 대기업 R&D 세액 공제를 줄여 세수를 확보하려 해 왔다"며 "이 방식이 새 정부에서도 이어지다보니 대기업의 R&D 동기부여 수단이 사라지다시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갈수록 민간 R&D 투자에 대한 세액 공제 혜택을 줄이고 정부가 키를 쥐고 R&D 예산 집행을 늘려나가는 것도 경계할 점이란 의견도 있다. 관료들이 전면에 나서면 같은 예산도 비효율적으로 쓰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황인학 한국기업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감사원 감사를 받는 관료 입장에선 R&D 예산이 절실한 곳보다는 성공 확률이 높은 곳에만 투자하는 경향이 있다"며 "축구공도 축구선수에게 줘야 지켜보는 모든 국민이 즐거워지듯, R&D 지원도 시장 플레이어에게 직접 줘야 사회적 효용이 늘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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