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석 "그라치에, 수선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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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년 만에 스피드스케이팅 메달을 안긴 이강석이 500m 레이스 도중 코너를 돌아 직선 주로를 향해 힘차게 질주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동메달이 확정된 뒤 태극기를 흔들며 기뻐하고 있는 이강석. [토리노=연합뉴스]

13일 오후 2시(현지시간.한국시간 오후 10시). 이제 2시간30분 뒤면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m 경기가 시작된다.

갑자기 이강석(21.한국체대)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스케이트 끈을 조이던 중 "툭"하는 소리와 함께 끈을 묶는 구멍이 찢어진 것이다. 꼭 1년 전 이곳 토리노에서 열렸던 월드컵의 악몽이 되살아났다. 당시 이강석은 1차 레이스에서 2위에 올랐으나 2차 레이스에서 구멍이 찢어지는 바람에 8위로 추락한 경험이 있었다.

김관규 감독은 스케이트를 들고 토리노 시내로 뛰었다. 간신히 구두 수리점을 찾았지만 그곳에는 두터운 스케이트를 꿰맬 재봉틀이 없었다. 구두 수선공은 직접 자신의 차를 몰고 인근의 다른 가게를 찾았다. 그러나 아직 점심시간(낮 12시부터 오후 3시까지)이었다. 식당을 뒤진 끝에 겨우 수선공을 찾아 바느질을 맡겼다. 김 감독이 택시를 타고 오벌링고토 경기장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3시20분. 경기가 시작되기 불과 한 시간 전이었다. 김 감독의 등에서는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고친 스케이트를 신고 경기에 나선 이강석은 1차 레이스에서 3위 기록인 35초34에 이어 2차 레이스에서 35초09에 주파, 합계 70초43으로 '금메달 같은 동메달'을 따냈다. 김윤만이 1992년 알베르빌 대회 남자 1000m에서 은메달을 차지한 이후 14년 만에 한국 스피드스케이팅에서 나온 메달이었다. 더구나 단거리인 500m에서 따낸 첫 메달이었기에 김 감독의 감격은 더욱 컸다.

합계 69초76의 조이 칙(미국)이 금메달, 이강석에게 불과 0.02초 앞선 드미트리 도로페에프(러시아.70초41)가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강석은 "0.02초 차로 은메달을 놓친 게 아쉽지만 모두 끝난 일이다. 동메달만으로도 다시 태어난 기분"이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또 "경기 중 (끈이 풀려) 넘어질까봐 출전 포기까지 생각했었다"며 "구두 수선공을 찾아가 감사의 뜻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토리노=성백유 기자

◆ 이강석은=2003년 한국체대에 입학할 당시만 해도 '스타트는 빨라 100m는 좋지만 나머지 400m는 형편없는 선수'였다. 이규혁 등 선배들에게 밀려 태릉선수촌을 들락거리던 그를 한국 쇼트트랙의 대부 전명규 한국체대 교수가 눈여겨봤다.

전 교수는 2004년 봄 이강석을 캐나다 캘거리로 보내 캘거리 오픈에 뛰게 했다. 전 교수는 친분이 있는 구로야 도시유키 당시 일본 국가대표 코치에게 이강석을 지도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 뒤 이강석은 무섭게 변했다. 120㎏짜리 바벨을 번쩍 번쩍 들었고, 곡선 질주 요령에도 눈을 떴다. 지난해 11월 월드컵 2차 대회에서 34초55의 한국신기록을 세웠고, 이제 세계 정상급 선수로 우뚝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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